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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러스씨 Mar 07. 2021

[11] 상대주의와 다양성이 비겁하게 쓰일 때

⏤ '상대주의'와 '다양성'이라는 말을 곡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모든 사람에겐 자기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모든 주장이 옳다'는 의미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70억 인구의 목소리를 모두 모으면 그건 아무 목소리도 아니며 완벽한 소음공해일 뿐인 것처럼, 모든 주장이 옳으며 어떤 삶도 괜찮다고 하는 따위의 주장은 듣기 좋게 들리지만 사실 텅 빈 공허한 말일 뿐이다. ('옮음'의 기준이 좁은 사회도 지옥이지만, '모든 것이 옳고 가능하다'고 말하며 완벽하게 열려 있는 사회 역시 지옥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지만, 우린 거기에 대해서 얘기해볼 수 있고 심지어 그걸 '틀렸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가끔 명백히 사실관계가 틀린 주장을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주장의 다양성을 존중하라!" 같은 희한한 대답이 돌아올 때가 있는데, 우리는 애당초 틀린 내용을 지적하는 것이지 다른 주장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며 상대의 다양성을 억압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사실관계를 바로 잡으려는 상대방의 논의를 교묘히 비틀어 다양성에 대한 공격으로 호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틀린 것'과 '다른 주장'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옳다 생각하는 것을 거리낌없이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얼마든 논의해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틀린 주장을 표현할 권리가 있고 누구도 당사자의 입을 막을 권리 역시 없긴 하지만 틀린 주장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틀린' 주장이 곧장 '다양한' 주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있다면, 그 사람은 틀린 것과 다른 것 사이의 경계를 교란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 다양성의 핵심은 '너 틀렸다'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며, 이때 비판은 이해와 얼마든 공존할 수 있다. 


   1961년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이뤄진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명백히 틀린 선택을 한 '저들'과 달라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아렌트를 맹렬히 비난했고, 왜 홀로코스트 같은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를 우리가 이해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이런 얘기는 놀랍게도 요즘도 나온다. 아마 요즘 같았더라면 아렌트는 "너희 가족이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거냐"라는 반박을 받으며 무지몽매한 PC주의자로 매도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렌트는 비판과 이해는 얼마든 공존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니,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히만을 이해하는 것은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옹호도 아니고 정당화는 더더욱 아니며, 우리를 위해서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때 '이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평범하다고 하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악마성을 드러내고, 더는 '저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이 발언하는 행위 자체며, 그 내용은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계속 질문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명백히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틀린 것'과 '다른 것'의 경계를 교란하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옳거나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상대주의 논법을 저 유리한대로 끌어다 쓰면서 뒤에서 맘편히 나쁜 짓을 일삼는다. '상대주의'와 '다양성'을 방패삼아 자기 악행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난 세월, "내 딸 같아서" 젊은 여성의 허벅지를 더듬는 새끼들이 용납되어 온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무엇이 옳은지 말하기 힘들다면 무엇이 틀렸는지라도 명확히 말하자. 선을 그어야 할 때는 확실하게 그어야 한다. 틀린 것은 그냥 틀렸다고 말해야 하며, 나쁜 것은 나쁜 것일 뿐이며, 결코 다양성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도 단호히 말해야 한다. 




"인류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타협 불가 키워드 두 개에 합의했다. 폭력과 이의 근원이 되는 차별은 더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는 식의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어디까지 대할 수 있는지 인류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폭력과 차별은 공적 엄벌의 대상이지 사적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차별받지 않고 그래서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인간이 그나마 존엄해진다는 사실은 인류를 이롭게 한 대표적인 일방통행의 결과다. 이 명제만큼은 노예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도 된다. 그럴수록 실제 노예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

   다른 생각을 금지시키니 ‘다양성’이라는 개념에 어긋난 건 아니냐고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혼란이 온다면 이것 하나만 명심하면 된다. 다양성은 ‘절대 악’이 저지르는 폭력에 맞서기 위한 개념이지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할 때 적용될 수 없다. 무지를 옹호하는 다양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백인들의 질서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누군가가 인종의 다양성을 인정해 달라면서 목숨 바쳐 부르짖었던 경우와 백인 우월주의자로 구성된KKK(Ku Klux Klan) 집단이 ‘내겐 흑인을 혐오할 권리가 있다’면서 다양성을 운운하는 걸 구별하는 건 상식이다."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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