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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러스씨 Mar 07. 2021

[12] 군대는 작은 사회가 아니다

⏤ 몰락해가는 사나이라는 레떼르를 붙잡으려는 몸부림에 대하여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 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한병철, 『피로사회』 중.





   작년 여름께, 유튜브에서 무슨사나이들이 인기를 끈 적 있다. 당시에 다들 난리이길래 뭔가 싶어서 관련 영상을 찾아서 봤는데 한마디로 너무 싫었다. 앞에 오 분 정도 감상하다가 나중엔 쭉쭉 넘겨보고 걍 껐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대체 한국 남자들은 군대 있을 땐 시스템의 부조리함에 공분하면서도, 왜 전역만 하면 이상할 정도로 그곳을 향수하는 걸까? 거기서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을 배웠다고 기를 쓰고 다시 지원을 해서 군대를 가려고 하고, 또 거기서 (굳이) '인생의 의미'나 '삶의 열정'씩이나 되는 것을 얻으려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 콘텐츠에서 내가 가장 짜증났던 말이 교관의 입에서 수시로 나오는 "너 하나 때문에 동기들이 얼차려 받는 거야, 알아?" 하는 말이었다. 저 말은 불합리함을 공공연히 내세우면서도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대표적인 논리이며, 군대의 악폐습을 경험한 한국 남성 대다수가 내면화한 말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해당 콘텐츠가 인기를 끌 때, 그 비슷한 시기에 법원 공무원이었던 친부로부터 12년 간 성추행을 당해온 끝에 겨우 입을 연 고등학생 딸의 사연이 올라온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12년간 침묵할 수 있었는지 차마 묻지 못했다한국성폭력상담소는 친족간 성범죄에서 가족이라는 사실이 피해 구제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다수 경우, '너만 참으면 된다, 너만 조용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하다'라는 무언의 압박이 피해자의 고소 의지를 죽인다는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군인정신으로 투철한 훌륭한 분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내가 스무 살 초반에 군대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책임으로부터 나도 자유롭지 않다.) 훈련소 들어가면서부터 공공연히 사용되는 언어가 얼마나 한 개인을 텅 비우고 거기에 전우, 국가, 명예, 수호, 국방, 나라사랑과 같은 추상명사로 '속'을 가득 채웠는지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갑갑하다. 훈련 과정에서 겪었던 부조리함은 어김없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포장되며 끝난다. 한 개인을 버리고 국가라는 틀에 맞는 협소한 자아를 욱여넣는 작업이라고도 생각한다. 해당 콘텐츠에 열광하며 댓글에서 자기 군생활을 털어놓던 남자들이 무척 이율배반적이다. 안에 있을 땐 '전역하면 자대 방향으로 오줌도 안 싼다'고 입을 모아서 말했으면서도, 전역만 하고 나면 대다수가 자기 군생활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니가 한 건 군생활도 아니얌마" 하며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하고 추억을 윤색하는 사람도 상당하다. 그 점에서 작년 여름, 사나이 시리즈가 다시 유행을 탄 건 한국 남자의 자아분열을 보여주는 거의 완벽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군대를 엔터테이닝의 문법으로 포섭해서 사람들에게 전시하고, 그것을 마치 진짜 남성으로 가기 위한 그럴싸한 성장 서사로 풀어내는 자체가 질이 나쁘다. 이런 콘텐츠가 자기계발의 문법을 등에 업고 득세할수록, 폭력성을 남성성으로 은폐한 채 당사자에게 전역장을 주고 가슴에 뱃지를 달아주는 방식으로 부조리의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은 수월해진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실제 내가 경험한 군대는 어떻게 비합리성이 한 집단을 규율하는지 배워서 나오는 최초의 장소였다. 오랜 악습이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진 군대라는 공간에서 남자들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까라면 까는" 복종 경쟁에 길들여진다. 명령이 부조리하면 부조리할수록 그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은 더 괜찮은 사람(잘 적응하면 'A급', 못하면 '폐급' 관심사병이라는 낙인이 찍힌다)으로 포장된다. 비합리적인 규율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장 잘 따르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포장되는데, 여기서 "군대는 작은 사회다"라는 논리가 가세하면서, 부조리한 명령을 잘 따르는 사람에게 포상이 주어지고 부조리함에 의문을 품거나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문관'으로 도태시키는 희한한 룰이 작동한다. "군대는 작은 사회다"라는 논리는 '군대에서 도태되면 사회생활도 잘 못한다'라는 암묵적인 주장이 내포되어 있어서 무척 강력하다. 벌써 군대의 비합리성을 습득하고 배워서 전역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 전체에 포진해 있다는 두려움도 한몫한다. 이 자체로 거대한 동조 압력이 형성된다. "까라면 까"라는 비합리를 개인에게 종용하고, 순응의 압박을 가해서 비합리적인 것을 따르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인 양 포장해온 것이 한국 전쟁 이후 반세기가 넘는 악습의 역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과거엔 이러한 수행의 매개체로 교육이 동원됐는데, 학교에서조차 학생들은 한 명의 예비 군인처럼 육성됐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만 해도 '교련'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과목이 있었다. 한 시대의 관용어를 살펴보면 그 시대가 갇혀 있던 구체적인 괄호를 볼 수 있다. 아직도 어떤 늙은 선생들은 교과서나 참고서를 갖고 오지 않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총 안 들고 전쟁 나갈 놈이네." 소위 군대식 사고방식이 얼마나 뿌리 깊게 우리 사회 전반에 녹아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대목이다. 그 점에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권상우가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라고 외쳤을 당시의 7,80년대 학교는 군복을 입은 교련 선생이 상주하고 있었고, 그 점에서 교육시스템과 결탁한 학교의 이름을 한 작은 군대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는 어쭙잖게 군대를 사회 바깥으로 가져와서 연결 지으려는 자체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유튜브에서 사나이 흉내 내는 이들은 이런 군대의 프로파간다를 동기부여와 자기계발의 문법으로 포장해서 사회에 공공연히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걸 보고 있으면 대체 내가 어느 시대를 사는가 싶다. 


   이런 프로그램의 가장 좋지 않은 점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군생활의 부조리를 다시 소환하도록 강제하는데, 그것을 다 좋은 기억으로 윤색시키며, 명백히 비합리적인 공간에 대한 합리적인 알리바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에게도 불분명한 애국심과 '리얼'한 사나이에 대한 막연한 판타지를 조장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원리도 지극히 부조리하다. 그걸 시청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학적인 쾌감을 준다. 과거 사례를 보면 연예인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내 땐 더했지' 하며 자기 추억과 비교하게끔 하고, 그중 한 명이 꼭 관심병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은근한 우월감을 갖도록 한다. (이건 유튜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한쪽 극단에는 '성실하고 책임감 넘치는 형' 같은 캐릭터가 꼭 한 명은 있고, 그 반대편 극단에는 '철도 없고 개념도 없지만 끝끝내 군대라는 공간에 잘 적응하는 관심사병' 캐릭터가 있고, 그 사이에는 이런저런 이미지에 맞춰서 전략적으로 소비될 사람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 연예인과 크리에이터라는, 대중의 선망과 시기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군생활을 한다는 것도 한몫한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유명인이 군대에서 부조리함을 감내하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끼며,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저들과 동등하다는 판타지를 누리기도 한다. 


   황당한 건 이런 엔터테인먼트 포맷이 공중파에선 인기를 다 했다는 것이다. 보여주기 식이라는 비판이 일고, 몇몇 여자 연예인들이 참가하며 화제를 끌자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못난 주장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기 시작했고, 덩달아 프로그램 포맷에 식상함을 느낀 청자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프로그램이 폐지된 지가 언 2년 가까이 되는 마당에서 갑자기 그에 대한 마이너한 보충으로써 유튜브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이다. 이걸 보면 일본의 극우를 비판할 계제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국뽕거리며 비아냥대도, '군대'는 영원히 먹혀드는 떡밥이라는 걸 보는 듯하다. 어떤 점에서 난 처참한 기분을 느꼈다. 네이밍 센스조차 시대착오적인 '사나이'들의 발악은,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에서 '사나이'라는 몰락해가는 레떼르에 집착하는 반동 현상같다. "대체 2020년에 특수병과훈련을 하필 일반인이 체험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라는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그놈의 '열정'은 군대 안 갔으면 대체 어떻게 가지나 싶고, 군대를 가지 않는 대다수 외국인들은 '나태'해서 인생 어찌 사나 싶다. 아무리 끝을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자신이 정의롭고 애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광화문의 애국보수들과, 저런 콘텐츠에 열광하면서 부조리를 합리성으로 뒤덮어 쓰면서도 그 모든 걸 '동기부여'의 문법으로 보는 '사나이' 지망생들은 한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사나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울뿐이고 얄팍하고 자기착취적인 가짜 논리 위에서 완성된 것인지를 몸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든다. 방송이 인기를 얻은 후에 일었던 몇 가지 노이즈들은 그닥 놀랍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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