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방학

1.소년의 미니선풍기

by 힐링작업소



영등포역 10시. 나는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에 노란 숏팬츠를 입고 엄마 손에 이끌려 거들먹거리는 표정의 중딩1학년 소년을 만났다. 웨이브진 머리에 곱상한 인상을 한 소년의 손에는 종이처럼 얇은 3쪽짜리 날개가 달린 미니선풍기가 들려있었다. 신기해하는 엄마에게 자기가 만든거라는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를 떠벌리며 나를 인계받는다. 소년에게 인계된 나는 이름모를 역들을 지나 서너시간 만에 온양역에 도착, 엔진이 운전기사 옆에 불룩 솟아난 버스에 올라탔다. 장난감인지 선풍긴지 본체에 달린 종이같은 날개는 느릿느릿... 급기야 몇 정거장 가지 않아 그마저 멈춰버린다. 자신의 발명품에 애도를 보내는 슬픈 표정의 소년이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요상하게 생긴 과자를 꺼내 건넸다. 불량식품 사절! 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에게 얻어 먹는게 불편했던 것일 뿐, 나도 불량식품을 좋아했다. 한번 더 권하지 않고 눈치없이 날름 과자를 제 입에 집어넣는 이 낯선 소년과의 동행이 싫지는 않았다. 버스는 울컹대고 속은 울렁대는 비포장도로를 한시간을 달려 거의 위장속 내용물이 목으로 올라올 즈음 버스에서 내렸다. 아.. 그런데 또 걸으란다. 땀과 어색함이 뒤범벅된 도보를 마치고 도착한 곳은 낡은 나무 두 쪽에 중간쯤 막대기를 가로로 걸어놓은 옛날식 나무 대문집. 소년은 ‘이리 오너라’ 를 외치고 문이 열리자 뛰어들어가더니 ‘아 더워. 큰엄마 수박 줘 수박!’ 털퍼덕 나무 마루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수박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그러는 사이 큰엄마로 불리는 아주머니가 내가 들고간 가방을 들어주시며 오느라 애썼다는 치하의 말과 함께 젖은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셨다. 처음 오는 집, 낯설었지만 부엌 뒷마당의 자두나무며, 마당의 우물이며, 윤기가 흐르는 나무로 된 마루며 모든 것이 맘에 쏙 들었다. 이것이 시골에 연고가 전혀 없는 우리 형제들에게 흙냄새를 맡으며 살아보라는 아빠가 내준 여름방학 숙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