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제
중요한 날의 전야(前夜)는 깊은 긴장과 설렘을 준다. 결혼식을 하루 앞 둔 밤, 대학입시 전날 밤, 먼 여행을 떠나기 전날, 크리스마스 이브가 그렇다. 그해 여름방학 온양 산양리에서의 마지막 날 밤, 그러니까 집으로 가야할 날의 전야. 모든 일상은 그대로였지만 내 맘은 홀로 전야의 분위기에 휩싸여 잠이 통 오지 않았다. 자연의 소리들만이 마을을 쏘다닐뿐, 어둡고 깊은 밤은 차라리 엄숙했다.
다음날 아침, 단조로운 시골 일상이 전화벨 소리에 깨졌다. 큰형님댁이 동네 사랑방이 되었던 한가지 이유는 당시 동네에서 유일하게 전화기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워낙 넉넉한 인심의 큰형님 부부는 애타게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리는 동네 사람들에게 마루를 내어주셨기에 집에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는 심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침 일찍 울려대는 전화는 좀 특별한 것이기에 모두 전화기로 눈길이 쏠렸다. 마당에서 청소를 하다 전화를 받으러 뛰어가는 일남언니, 부엌에서 급히 나오시는 아주머니, 안방에서 마루로 나오시는 큰형님, 무슨 전화인지 궁금한 나와 소년이 전화기 한 대 앞으로 모여 들었다.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참한 일남언니가 나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언니가 당황한 얼굴로 대답만 하고 끊었다. 그 시간 어떤 내용으로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는 곧 밝혀졌다. 일남언니의 열애상대인 행시패스생! (여기서 잠깐! 왜 고시에는 합격이란 말보다 패스라는 말이 더 어울릴까? ) 일남언니의 있는 곳을 수소문하고 번호까지 알아낸 모양이었다. 역시 머리좋은 고시패스생! 그런데 그 전화를 받고 쾌활한 척만 하던 언니 얼굴이 진짜 쾌활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 그 패스생이 산양리에 온다는 내용을 부모께 전할때는 목소리도 조금 떨렸고 아주머니는 벌써부터 차릴 음식 걱정을 하시며 좋아하셨다. 정작 그 소식이 기쁘지 않았던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날 오후 서울 집으로 올라가야하니 행시패스생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아서 번호를 알아낸 것이 아닌 정말 일남언니를 너무도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임을 그때는 몰랐다. 그저 나는 심술이 나서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온양에서의 마지막 숙제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