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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 May 29. 2023

요상한 하루

- 무심씨의 무심하지 않은 다른 이야기

평소에 지하철, 지하로 들어가지 않는 전철을 잘 타지 못한다. 산후우울증 이후 겪고 있는 공황장애로 인해 좁은 공간, 사람이 가득한 공간, 여러 가지 소리가 섞인 곳 등은 쥐약이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꾸준하게 치료를 받고 있어서 가끔은 탈만하다.


'가끔은 탈만하다'

이 한마디 생각이 버그를 일으켜 요상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금요일이었다. 그것도 출근시간인 오전 8시. 공황장애 치료 시작 후 이 시간대에 열차를 타본 적이 거의 없어 예전의 기억들조차 치고 올라오지 않았다.

행신역에서 아현역까지 가기 위해선 경의중앙선을 타고 홍대입구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다행히도 7시 51분 급행열차를 탈 수 있었다. 급행이라 그런지 콩나물시루 속 콩나물 마냥 빼곡히 가득 차 있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다행히 출입문쪽에 자리를 잡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급행이라 좀처럼 문이 열리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앞에 자리를 잡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의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 파란색 작은 세모표시가 요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 상 주식은 장이 열리기 전이니 아마도 코인시세표인 듯 싶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느새 작은 웃음소리가 마스크 사이로 새어 나왔다.


"여보? 이것 좀 봐"

"벌써 도색을 시작했네, 좋다."

"그렇지? 멋있지?"


부부가 보고 있는 것은 양주 옥정의 민간임대 아파트 건축현장 사진이었다. 아마도 민간임대 분양을 받은 모양이다. 뉴스에 나오는 로또 분양지역도 아니고 소유권 분양도 아니지만 그들은 아마도 인생 최고의 분양이 아니었을까 한다. 임대 분양은 8~10년 후엔 시세보다 저렴하게 분양도 받을 수 있다. 고로 그들은 내 집을 마련했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생애 첫 새 아파트, 내 명의의..


어느새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행복한 부부덕에 조금은 편안하게 아현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아현역에 내리면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출구를 볼 수 있다. 1번 출구와 2번 출구

북아현동으로 나가는 이 두출구엔 여러 가지 의미와 모습이 담겨 있다. 출구를 나와서 보면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1번과 2번의 차이를..


1번 출구는 새로 지은 e 편한 OO, 푸르지O, 등 매매가 10억~16억을 호가하는 아파트들이 즐비하고 별다방 등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 마트 등 생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2번 출구로 나와 길을 걷다 보면 족히 30년 이상 된 건물, 작은 골목길, 가파른 언덕길에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 재건축 조합, 조합장의 교체를 요구하는 붉은 현수막 등 길건너편의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찾아볼 수 가 없다.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오늘 만나기로 한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는데 주소로 집을 찾기가 어려워서요"

"아이고, 전화라도 미리 해주시지, 지가 깜빡하고 넋 놓고 있었네요"

"제가 나갈 테니 쪼매만 지둘려 주세요"


아이 문제로 만나기로 한 엄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9-9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오전 일찍 만나기로 했다. 잠시 후 언덕길에서 부스스한 머리, 퉁퉁부은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 엄마가 보였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네, 아이고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어어요"

"괜찮아요. 그런데 어머니 서류에 서명을 해주셔야 하는데.. 어쩌죠?"

"여기 앉아서 하면 안 될까요?"


아이 엄마는 길거리 다세대 주택 앞 계단을 가리키며 동의를 구했다.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제가 기다리면서 보니 저기 참기름집 앞에 의자가 있더라고요. 거기로 갈까요?"


우리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참기름집 가게 앞 의자에 앉아 필요한 서류에 부모 서명을 받았다.


"이제 우리 애기 문제 다 해결된 거죠?"

"네네,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마음은 1번 출구를 이용하는 엄마들보다 깊었다.

아이 엄마는 운동삼아 식당이 있는 시청역까지 걸어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듣기에는 '차비를 아끼려고 걸어 다닌다'라고 들렸다. 12시간을 일하지만 괜찮다고 한다. 중간에 4~5시에는 쉬는 시간이라고.. 어느 날 4시 40분에 전화를 했었는데 통화가 되질 않았었다. 6시 50분쯤 통화가 됐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한테는 '너무 피곤하고 잠이 모자라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로 들렸다.




이상한 하루는 택시기사님으로 마무리되었다.


더 이상 전철을 탈 수 없기에 1번 출구 쪽 별다방에서 벤티사이즈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들고 택시를 기다렸다. 서울은 경기도와 다르게 콜을 하지 않아도 택시를 탈 수 있어 좋다. 서너 대의 택시가 '예약'을 깜빡이며  지나쳐 갔다. 이런, 서울도 콜인가?

잠시 후 내 앞에 선 택시를 기쁜 맘으로 탔는데 문을 열자마자 뒷좌석 창문을 모두 열었다. 기사님은 70대 이상으로 보이고 겨울 패딩을 입고 계셨다. 백발의 엉성한 머리카락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엉겨 붙어 있었으며 핸들 위 손톱 끝은 거뭇거뭇했다. 그리고 택시 안의 이 냄새.. 기억이 났다.

서울역 지하차도를 건널 때 자리 잡고 누워 계시는 그분들의 독특한 냄새와 다름이 없었다.


신촌을 지나 홍대입구 쪽으로 향할 때..


"아이고, 내가 이런다니까, 메다를 늦게 눌렀네.. 봤죠? 내가 늦게 누른 거"

"네:?"

"그러니까 천 원만 더 주세요"

"네, 드릴게요"


기사님은 내가 타자마자 미터기를 누르셨다. 개인택시라고 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분의 택시는 아닌 듯싶었다. 20분 남짓한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카드 찍을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거 오백 원이라도"

"여기, 천 원이요. "

"아이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택시에서 내려 미세먼지 가득한 바깥공기가 이렇게 청량했는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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