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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산 Aug 05. 2020

'안톤 쉬거'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Theme>



사람들은 '마땅함'을 마땅히 여긴다


지난달엔 게이머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노린 <바람의나라: 연>, 그러니까 모바일 버전 바람의나라를 플레이했다. 어렸을 때 엄마 몰래 새벽에 바람의나라를 하다가 걸리기도 했고, 몰래 정액제 결제를 했다가 된통 혼나기도 했고, 대학 입학 전에 시간이 남았을 땐 친구들과 최종 콘텐츠까지 플레이하기도 했다. <바람의나라: 연>이 나온단 소식에 들떴던 건 당연하다. 출시되고 나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주위사람과 틈틈이 플레이했다. 옛날 바람의나라랑은 많이 달랐지만 제법 재밌었다. 지금은 접었지만 몇 주 신나게 놀았다.


<바람의나라: 연>에는 특별한 사냥터가 있다. '폭 12지신의 유적', 줄여서 '폭굴'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경험치를 엄청 많이 주는 대신 유저끼리 공격을 할 수 있다. 그룹을 구성해 사냥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그룹과 전투가 붙고, 전투력이 엄청 높은 캐릭터가 와서 학살을 하기도 한다.


재밌었다. 하지만 오래 할 맘은 안났다. 잘 가라, 나의 도적..

문제는 사람들이 전투나 학살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거다. "다른 채널로 옮겨 주세요"라거나 "공격을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싸움을 피한다. 재미 삼아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쌍욕을 박고, 인품을 깎아내리고, 캐릭터 방명록에 휘황찬란한 저주의 말을 쏟아낸다. 자기 캐릭터를 죽인 캐릭터의 이름을 기억해 뒀다가 친구들이나 문파원을 데리고 1주일 넘게 쫓아다니며 복수를 하기도 한다. 나도 몇 번이나 당했다. '자동사냥' 버튼을 눌러 두고(요즘 게임에선 이게 필수라고 한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는데 유령이 된 캐릭터를 봤을 때의 짜증이란...


하지만 '폭굴'은 원래부터 유저 간 공격이 허용된 곳이다. '폭굴'에서 다른 캐릭터를 죽이고 다니는 게 <바람의나라: 연>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는 거다. 누구나 폭굴 안에서 전투가 가능하단 걸 알면서도 사냥을 하러 온다.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친구와 술을 마시며 열심히 사회학적 분석을 하기도 했지만 설익은 분석은 아껴 둔다.)


몇몇 요인도 생각해볼 수 있다. '폭굴'에 입장할 레벨이 되면 다른 곳에서 경험치를 얻기가 어려워 여기가 유일한 사냥터라는 절박함(?)도 있고, 멀리 나가면 '폭굴'에서 자기 캐릭터가 죽어나가는 모습에 좌절한 게이머들이 캐릭터 성장을 위한 현금 결제를 하도록 유도하는 게임사의 전략이니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학살을 하는 유저들에게 화를 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폭굴'에서 유저 간 전투가 원래 가능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쌍욕을 하고 저주를 하는 건 좀 과하다. 그런 과함이 여기저기서 분출된다. 유저 간 전투가 늘 활성화된 리니지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그건 유저들끼리 어떤 '마땅함'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선 경험치를 얻기가 쉽지 않으니까, 여기에서 유저끼리 전투를 하는 건 게임사의 전략에 말려드는 거니까, 열심히 사냥하는 다른 유저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뭐 무슨 이유가 있든, 결론적으로는 학살을 하면 안 된다고.


명문화된 법률이 없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마땅함'을 일종의 도덕률로, 보이지 않는 법률로, 반드시 혹은 되도록 지켜야 하는 자연법으로 받아들인다. 그걸 증오하는 영화 캐릭터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다.




2회차 관람. 이 영화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扮)다. 안톤 쉬거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와 비슷하다. 이 캐릭터가 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안톤 쉬거가 '죽음 그 자체'라거나 '운의 화신'이라는 식의 해설에는 전혀 수긍이 가지 않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니까. 쉬거가 무슨 화신이라면 노인만 위험한 게 아니라 누구나 위험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품이 보안관 에드와 같이 유능한 노인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혼돈의 세상을 비판한다는 주장에도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의 혼돈을 은유한다기엔 안톤 쉬거는 지나치게 파격적이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코언 형제에게 "대체 안톤 쉬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라고 묻자 형제가 "이해할 필요가 없다"라고 대답한 일화도 영 불만이었다. 영화를 신비화함으로써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식의 인식을 조장하기만 해서다.


오히려 작품은 아무리 어떤 정의를 추구하고 룰을 지키며 살아도 걸맞은 보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망가지기만 하는 사회를 꼬집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의 환멸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인간과 사회의 무수한 배신으로 뒤통수를 후려 맞으며 지쳐 간다. 지쳐 간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노인이 되는 모든 사람들, 늙어 간다는 건 지쳐 간다는 것이다. 그 모두를 위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는 건 그 누구를 위한 나라도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건 '어떻게 살아도 그따위로 반응하는 세상에 대한 자조'다.


안톤 쉬거가 그 점을 가장 명확히 방증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끔찍한 범죄를 다룬다. 시작부터 내레이션으로 보안관 에드가 겪었던 강력 범죄 사건을 이야기한다. 요즘 범죄엔 딱히 동기도 없다고. 뒤이어 미친 살인마 안톤 쉬거가 등장하는데, 내레이션에 등장한 범죄를 상기한다면 안톤 쉬거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안톤 쉬거는 무시무시한 혼돈과 재앙과 죽음 그 자체로 설명되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쉬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인식은 그가 불가해하다는 건데, 도대체 왜 사람을 죽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나 동기가 없다.


이만한 악역 찾기도 쉽지 않다




누구나 안다

'마땅함'에 대한 믿음은

수시로 뒤통수를 친단 걸

그래서 더 갈구하는 걸까?



주목해야 할 지점은, 안톤 쉬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의 바닥에는 이유와 동기가 있으면─혹은 있어야만─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있다는 점이다. 안톤 쉬거의 불가해성이 공포스러운 건 사람을 죽일 만한 사전事前의 원인과 사람을 죽이게 되는 사후事後의 결과가 연결되어 있다는, 혹은 연결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깨져서다. <조커>의 조커가 혐오감을 자아냈던 것도 사전의 원인과 사후의 결과가 잘 접합되지 않는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마땅함'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간다. 우연이나 돌발상황 같은 게 들어서서는 안 되며, 가령 범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좋은 행동엔 좋은 결과가 소환돼야 하며, 어떤 원인이 있으면 당연히 어떤 결과로 이어져야 하고, 어떤 결과를 위해선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쉬거는 마땅함에 대한 믿음을 혐오한다


그것도 아주 극도로. 자신을 추적한 카슨 웰스를 죽이기 전에 "믿고 따른 룰 때문에 이 꼴이 됐다면, 그딴 룰을 어디에 쓰나?"라고 물었고, 르웰린 모스의 아내 칼라 진이 "이럴 필요 없잖아요"라고 말하자 "하나같이 그 소리군"이라며 진저리를 쳤다. 쉬거는 사전의 원인과 사후의 결과가 이어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밖에서 봤을 땐 마땅찮은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 동전 던지기라는 이미 어처구니없는 자기만의 룰을 따르는 척하더니, 그 룰에 따르지 않은 칼라 진도 결국 죽여버린 것처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믿거나 믿고 싶어 하는 마땅함을 쉬거는 아예 부정한다. 믿지를 않는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일 거라고, 내지는 자기와 비슷한데 믿음이나 룰에 속박돼있다고 생각한다. 가게 주인이 아내를 사랑해서 왔다고 하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재산을 노리고 왔다고 단정해버린 이유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두려움도 혐오한다. 두려움은 사전의 원인과 사후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니까. 가게 주인은 죽이려 하고 컨테이너촌 직원은 죽이려 하지 않은 이유다.


쉬거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대로 물어야 한다. "왜 이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라고. 쉬거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상이란 애초에 사전의 원인과 사후의 결과가 전혀 접합되지 않는 불합리한 곳이므로, 누구도 그에게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쉬거는 개인의 행위에 사회적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한 자의식 과잉이자 지 말만 맞다고 우기는 사이코패스란 게 더 명확해진다.


쉬거가 왜 그런 것들을 혐오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에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서 보면, 어쩌면 쉬거도 참전 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마땅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간 경험에 치를 떨었을 수 있다. 전장과 사회의 배신을 경험한 인간은 높은 확률로 사회에 대한 신념을 잃고 안에서부터 망가지기 마련이니까. 쉬거는 무기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참전 군인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존중하는 척하며 한편으로는 쓸모없는 전쟁광 취급하는 양가성을 띤다는 게 미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란 걸 상기할 수도 있겠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그 점을 지적하기도 했고. (이런 생각조차 쉬거를 낳은 '마땅한 원인'을 찾는 시도란 게 웃기지만.)




미장센이 정말 멋졌다


쉬거와 보안관 에드는 둘 다 불합리한 세상에 환멸하는 인물이다. 차이는 있다. 쉬거는 불합리한 세상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냉혈한이다. 반대로 에드는 좌절하는 인물이란 점이다.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자조하고 있는데, 자기 관할 구역에 불가해한 살인마가 또 나타났고, 지키겠다고 한 사람을 지키지도 못했다. 에드가 무능했다는 평가도 있던데, 에드가 무능하면 세상에 유능한 인간은 없다. 현장에서 에드는 과할 만큼 유능했다. 그의 유능함을 돋보이게 할 후배 보안관도 있을 정도로. 그런데도 그는 '마땅함'의 원리에, 실력 좋은 보안관이라면 사건도 잘 해결해야 한다는 자신과 타인의 기대에 기여하지 못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은퇴를 해버린 까닭이다.


그의 좌절은 '그 장면', 에드와 쉬거가 함께 있던 모텔방에서 드러난다. 쉬거는 에드를 보고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는데, 그건 쉬거가 에드의 카리스마에 눌렸거나  게 아니다. 에드도 불합리한 세상에 환멸을 느낀단 걸 쉬거가 알았기 때문이다. 에드는 그 방에 쉬거가 있을 수 있단 걸 알았다. 문고리에 공기총(?) 자국이 있었고, 문 이외의 유일한 탈출구인 욕실 창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탈출한 사람이 없단 거였다. 게다가 환풍구를 열 때 썼던 동전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직 쉬거와 한 방에 있을 수 있었다. 사건 현장을 얼핏 보고도 많은 것들을 알아맞히는 베테랑 보안관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쉬거도 그걸 알았다. 에드가 욕실을 검사하고 떨어진 동전을 보는 모습을 지켜봤으니까.


그런데 에드는 총을 놓고 허탈한 듯 침대에 주저아 있을 뿐이었. 인범에게든 사회에게든 가 졌다는 듯이. 이 방에 살인범이 있든 말든, 더 이상 노력해 봐야 뭐가 달라지냐는 듯이. '진짜 보안관'이라면, 안전한 길거리를 위해 범죄를 소탕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당장에 적개심(그리고 두려움)에 가득 차 총을 여기저기 겨눴을 테지만, 불합리한 세상에 좌절한 에드는 두려워하지도 적개심을 품지도 않았. 그건 쉬거의 혐오를 사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딱히 살인 충동이 일지 않았을 수 있다. 동족의 냄새를 맡고. 쉬거는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가만히 에드를 지켜봤다.




끝내 세상의 마땅함에 대한 일말의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거의 죽었고, 좌절한 에드와 살인마 쉬거는 살아남았다. 권선징악 같은 올바름에는 쌀 한 톨 내어주지 않는 지독함, 세상은 원래 이렇다는 담담한 절망, 그게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따위 룰 지켜서 뭐하냐는 쉬거의 질문에 에드는 공감했을 것이다. 에드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지만, 영화에선 조금 편집되어 나온 도입부의 독백에서 거의 대놓고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한다:


도박하듯 삶을 걸고 밖으로 나가서 이해도 안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진 않다. 그러는 게 내 직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무슨 의미인지 더 모르겠다. 말하자면, 알고 싶지도 않다. 난 운명을 운에 맡겨야 하는 남자지만. 이렇게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 나도 이런 세상의 일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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