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잡문집>>을 읽고(비채, 201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최근 교보문고에서 평대에 놓여져 있던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보고 돌아온 이후다. 읽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하루키의 일상 습관들, 가령, 아침에 일찍 일어나 꼭 달리기를 하고 오전 내내 글을 쓴 후, 오후에는 맥주를 한 병 마신다는 식의 그의 루틴을 좀 더 탐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요즘 내 일상의 루틴이라고 하면 걷기, 필사, 모닝페이지를 꼽는데 그것마저 시간이 들쭉날쭉 이고 건너뛰는 날도 심심찮다. 그 와중에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아이 챙기는 게 다다. 이런 내가 싫어지면서, 아니 두렵고 공포가 느껴져서 온전히 '자기 결정'으로 규칙적인 삶을 사는 그를 탐구해 보고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저자무라카미 하루키출판비채발매2011.11.22.
<<잡문집>>, 말 그대로 그가 여기 저기 요청을 받고 혹은 그저 생각나는 것들을 쓴 글을 엮어낸 책이다. 첫 글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제목과 부제가 사뭇 의심스러운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이었는데, 이 두 제목 사이의 연관관계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무릎을 탁 쳤다. 하루키는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원고지 8매를 써야하는 취업준비생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단다.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원고지 8매 이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생각에 그건 굳이 따지자면 의미 없는 설문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예를 들어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8매로 쓰는 일은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름바 나의 ‘굴튀김 이론’입니다.”
이 글은 최근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을 다시 읽어보기 전에 읽었다. 페터 비에리는 ‘자기 인식’에 관한 방법을 말할 때 자기 인식을 자기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며, 외부의 경험에 눈을 돌려 그 경험 혹은 현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을 권한다. 지금 정리하려고 다시 들춰 읽다보니, 하루키의 ‘굴튀김 이론’이 그가 권한 방법론과 일맥상통한다. ‘나’를 인식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나’를 설명하려 한다거나 생각이나 느낌을 펼쳐내려 하는 방법은 결국 제대로 된, 정확히 표현하자면 객관적인 나를 드러낼 수 없다. 객관적 시선으로 ‘나’는 반드시 외부에서 내부를 관통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자기 결정저자파스칼 메르시어출판은행나무발매2015.09.21.
다음으로 이 책이 내게 인상 깊게 다가온 부분은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 혹은 어떤 동기화 요인에 관해 쓴 것이다. 그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서른 살에 첫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이렇게 썼다.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거의 펜을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글을 쓸 때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남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남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라”라는 피츠제럴들의 문구만이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히 될 리는 없었다. 마흔 살이 되면 조금은 나은 글을 쓸 수 있겠지, 라며 계속해서 썼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서른 여덟 살 때 <<노르웨이의 숲>>을 발표하고 ‘이게 그때 상정했던 십 년째의 일단락일까’라고 문득 생각했다고 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저자무라카미 하루키출판문학사상사발매2006.03.24.
노르웨이의 숲저자무라카미 하루키출판민음사발매2017.08.07.
또한 다음과 같은 하루키의 진지한 면도 좋았다. 이 글은 하루키가 예루살렘상을 수상했을 때 수상연설문이다. 당시 가자지구의 사태가 벌어져 국내외에서 그 상을 받는 하루키를 비판하는 물결이 거셌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소설을 읽은 독자를 생각하며 직접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의 목소리로 생각을 밝혀야겠다고 판단하고 이 글을 준비했다고 한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 나갑니다. ...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우리는 모두 개개의 인간입니다. 시스템이라는 굳세고 단단한 벽을 앞에 둔, 하나하나의 알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벽은 너무나 높고 단단하며, 또한 냉혹합니다. 혹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이길 가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걸 믿고 그 온기를 한데 모으는 데서 생겨날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실감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영혼이 있습니다. 시스템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이용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시스템이 홀로 작동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가자 지구’를 검색해봤다. 팔레스타인 영토지만, 본래 유대인 정착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을 팔레스타인 총리가 이스라엘로 철수시키면서 이스라엘이 바닷길을 막았고, 이집트도 국경을 열어주지 않아 봉쇄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무장 단체, 군벌 조직인 하마스가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고 절망적인지 나는 가늠할 길이 없다. 이스라엘은 휴전을 했다가도 공습을 퍼붓는 등 교전은 계속되고 있다. 종교적 이유가 크겠지만, 그건 명분일 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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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특히 재즈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음악을 기본적으로 사랑한다.
“나이를 먹어서 좋을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젊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거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입니다. 한 걸은 뒤로 물러서면서 전보다 전체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 물론 반대로 젊을 때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나 문학도 있지만요.
나에게 음악이 가진 최대의 훌륭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 물론 그것은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이라는 뜻이니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인생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 크게 달라지게 만드니까요.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일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나에게 이렇게까지 기쁨을 주는 일은 무엇일까. 돌이켜 보게 된다. 비에리의 논리를 마치 하루키가 자신의 예로 다시 설명해 주는 기분이다. 특히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 인생을 만들어 간다”는 표현은 정말로. 페터 비에리는 ‘무엇이 나이고 내가 아닌지, 혹은 무엇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인지를 안다’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것이 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방식도 유용하다고 설명한다. 하루키는 딱 그 방식을 음악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자기 결정저자파스칼 메르시어출판은행나무발매2015.09.21.
나아가 그 음악을 통해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가장 기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리듬이다. 자연스럽고 기분 좋으면서도 확실한 리듬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계속 읽지 않겠지. 나는 리듬의 소중함을 음악에서 배웠다. 그 리듬에 맞는 멜로디, 요컨대 적확한 어휘의 배열이 뒤따른다. 그것이 매끄럽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리고 하모니. 그 어휘들을 지탱해주는 내적인 마음의 울림. 그 다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즉흥연주다. 특별한 채널을 통과한 이야기가 내부에서 자유로이 솟구쳐오른다. 나는 그저 그 흐름을 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이 온다. 작품을 다 마치고 맛볼 수 있는 ‘내가 어딘가 새로운, 의미 있는 장소에 이르렀다’는 고양된 기분이다. ...
셀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
요?”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 담는 거야.(It can’t be any new note. When you look at the keyboard, all the notes are there already. But if you mean a note enough, it will sound different. You got to pick the notes you really 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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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고 했다.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고. 지극히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게 소설가가 할 일이라고.
...
책 전체를 꼼꼼하게 완독한 것은 아니다. 500페이지에 달하는데다 재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나 내가 모르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뛰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빌린 처음 의도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일일시간표를 세울 수 있을만큼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그리고 어떤 선상에서 현재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정도는 그려낼 수 있었다.
그의 세련미는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되 일상의 행위를 무겁지 않게 시도하고 해내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결과를 기대하지만 기대하는 결과가 아니더라도 조급해 하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넓은 도량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느껴졌다. 그가 피츠 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에 관해 썼던 글에서처럼.
“<<밤은 부드러워>>를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냉철하게 비평해나가면 몇 가지나 결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이 작품은 도량이 큰 소설이다. 결함이 거의 없는, 아주 잘 쓰인, 그러나 도량이 크지 않은-혹은 도량을 거의 갖추지 못한- 소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 소설은 일시적으로 유행할 수는 있어도, 화려한 월계관을 쓰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어딘가로 사라져 잊힌다.”
밤은 부드러워라저자F. 스콧 피츠제럴드출판문학동네발매2018.06.05.
‘도량’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봤다. 도량은 ‘度量’이라 쓰고, ‘사물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처리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뜻한다. 그는 이 세상에, 한 명 한 명의 인간을 향해 도량이 큰 사람으로 보인다. 결함이 있고, 매번 아주 잘 쓰는 소설가가 아니지만 도량이 큰 소설가로서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 그가 가는 길은 바로 그런 길인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