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요독서

쉽게 단정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그것이 철학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 리뷰

by 곰선생

철학의 역사는 의심의 역사라고 하는데, 실제로 철학 고전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의심하기보다는 덮어놓고 뭔가를 주장하기에 바쁘죠. 또 무슨 할 말이 어찌나 그렇게 많은지. 우리를 어지럽히는 현란한 논증과 언변에 우리는 금방 주눅이 들거나 지루함을 느끼고 맙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철학도 있습니다. 이 철학은 독단적인 주장을 거두어야 한다고 간결하고 소박하게 논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현대인의 상식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으로는 아주 문제적인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은 철학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철학, 반대로 주장을 검토하는 게 철학의 일이라고 말하는 철학. 무언가를 주장하는 논증엔 반드시 논리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철학. 진짜 철학적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입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단연 ‘의심’입니다.


피론주의는 철학의 역사에서 의심하는 학파인 이른바 회의주의의 시조로 간주됩니다. 여기서 피론은 사람 이름인데, 알렉산더 시대에 살았다고 알려진 철학자입니다. 피론주의자들은 주로 앎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진짜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즉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그런 의심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도구, 절대적 앎을 주장하는 사람의 관점을 상대적인 위치에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총 10가지인데요. 관찰자의 상태라든가 그가 놓인 환경 등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규범이나 관습 등이 미치는 영향을 부각하는 문화상대주의적 논증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앎에 대한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전략이 이 책에 거의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한 결과 우리는 결론을 내리는 것을 중지합니다. 이것을 판단의 중지, 고대 그리스어로는 에포케라고 합니다. 그리고 멈춤 없이 끊임없이 연구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고대 그리스어로 스켑티코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회의주의를 가리키는 단어인 스켑티시즘이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제가 이 책과 함께 추천해드리는 콘텐츠는 3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계간 잡지 <스켑틱>입니다. 고대의 피론주의자들은 독단적인 주장을 의심했다고 하는데, 현대의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 한 가지 답을 제시해주는 사례가 저는 <스켑틱>이라고 생각합니다. 근거 없는 비과학적 주장에 대해 근거를 들어 합리적으로 의심해보고, 과학적 추론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그럴듯한 추정을 내놓지만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진 않는 그런 태도. 저는 이런 근거 중심의 과학적 태도야말로 현대의 회의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러니까 <스켑틱>은 과학잡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어렵지 않고, 우리가 한 번쯤 의문을 가지게 되는 철학적/형이상학적 질문에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잡지이니만큼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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