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슬픈 인연'은 듣지 마요
"야 썅노무 새끼 아냐 그거?"
양손 가득 준비해간 소품을 갑자기 안 찍겠다며 강짜 놓는 사진 작가 때문에 엉엉 울며 전화한 20대의 내게 선배의 그 한마디는 천군만마의 위로가 됐다. 사이코 같은 사수와 악플에 시달릴 때도 "그거 다 별거 아니다. 다 지나간다"던 선배의 말은 좋은 말만 적힌 예언서처럼 내 어두운 밤들을 지켜줬다. 그런데 선배는 아팠을 숱한 그 밤들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몇 년 전 결혼식에서 바싹 마른 몸으로 딸에게 축사를 전하던 선배를 보고 놀라, 선배의 몸 상태를 처음 알게 됐다. 암 4기라는 것도, 전이가 됐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게 몇 년 산도 가고 바다도 가며, 선배는 또 괜찮은 듯 살아갔다. 얼마 전부터 했던 말을 자꾸 하고, 밤 늦게 보낸 정신 없는 톡 내용이 뇌로 전이가 생겨 생긴 문제인 것도 모른 채, 난 선배에게 왜 자꾸 깜빡깜빡 하느냐, 술 드셨냐며 속도 모르는 얘길 했더랬다. 몸 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의사소통은 물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선배를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주했다.
한 달 전만 해도 기운 차게 업무 얘기를 했던 선배는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 있는 어른처럼, 바싹 마른 채로 수액을 맞고 있었다. "선배, 저 OO이에요~!" 크게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 눈을 번쩍 뜨고, 내 손을 꽉 쥐던 힘이 너무 세서 놀랐다. "선배 얼른 일어나 소설 써야지, 왜 이렇게 누워 있어~" 선배가 좋아했던 고양이 울음소리 영상을 틀어주고, 015B의 노래도 틀어주고, 선배한테 쓴 편지도 읽었는데, 선배는 다 들었을까.
호스피스 병동에서 선배를 마주 한 뒤에도, 의사에게서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들은 뒤에도, 해야 할 일들과 해내야 할 업무, 해둔 약속들은 그대로여서 난 회의를 하고, 계약서를 쓰고, 비행기를 타고, 술을 마셨다. 장례식장에선 울지도 않고, 오랜만에 만난 잡지계 선후배들과 웃으며 회포도 풀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슬픈 인연'을 듣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톱스타에게도 기 안 눌리던 가요 기자 시절의 짱짱함, 불의를 보면 안경 너머로 부리부리한 눈빛의 전사가 되던 작은 거인, 넘치는 패션 센스, 아까움 없이 자기 것을 꺼내 후배들에게 주던 모습. 그랬지, 어떤 셈도 없이 누군가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었지 선배는.
"늘 고맙다"
"잘 하고 있다"
"더더더, 잘 되거라"
카톡에 저장된 선배는 말끝마다 '고맙다'를 붙이고 있었다. 해준 것도 없는 후배에게 뭐 그리 고마울 게 많았을까. "너는 나를 암 환자처럼 안 대해줘서 좋았어. 화낼 거 화내고, 성질 낼거 성질 내주고, 일에 대해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그래서 좋았지."
오늘 발인이 끝났다. '슬픈 인연'은 당분간 듣지 못할 것 같다.
사랑하는 선배, 마지막 전화 받지 못해 죄송해요.
날카롭고 차가운 이들로 가득한 잡지계에서 선배를 애정하는 후배들이 이만큼 그득하니 이번 생은 성공했어요 선배. 내가 아는 남자 중에서 가장 꼰대 같지 않고, 만다라 문신이 가장 잘 어울렸던 댄디한 선배. 어디 먼 데 안 가고, 지금보다 조금 더 살찐 몸으로 마드리드의 햇살을 받으며 소설을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래요 전. 제 마음이 컴컴한 지옥 속으로 떨어지지 않게 된건 팔할이 선배 덕이에요. 덕분에 상처 덜 받고 넘치게 위로 받았어요. 선배 말대로 이거 별거 아니잖아요.
잘 지내요 선배. 멋졌어요.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