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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May 18. 2021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나의 결혼생활이란

내가 소개팅에 내건 조건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이상하게 내가 만났던 구 남친들은 무슨 일을 하든 일하기 싫다는 푸념을 자주 늘어놓았다. 감정 쓰레기통이 된 기분도 싫었고 딱히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 무력감도 느껴졌다.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던 나 역시 가끔은 일에 대한 불만이 생기곤 했는데 그때마다 구 남친들은 “그래도 넌 좋아하는 일 하잖아”라는 명언을 남겼다. 아니 이런 물도 없이 고구마 백 개 먹는 소리를? 그래서 내건 조건이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남자와는 대체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내 전화번호가 그에게 건네진 그날, 연락이 왔다. 만날 날을 잡아보자는 카톡이었다. 자기 일을 너무 사랑하는 남자와 나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결국 평일 출근 전 집 앞 카페에서 짧은 만남을 갖기로 했다. 무려 아침 7시 30분에 말이다.


소개팅에 나온 남자를 보며 의아했다. 세팅된 머리부터 양말 하나까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몸치장을 한 거지? 일어나자마자 30분 만에 눈썹만 그리고 헐레벌떡 뛰어나간 나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었다. 그 시간에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남자가 마냥 신기했다. 아침에 만나서 대체 뭘 하나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잘 흘러갔다. 그 남자가 아주 신바람 나게 본인 회사 화장품 브랜드를 소개해주었는데, 그것마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전 7시 30분에 화장품 아저씨의 상품 설명을 듣고 앉아있다니…. 그것도 물개 박수를 치면서? 나는 입이 풀리려면 점심은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말을 재미있게 하는 남자라니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평소라면 자고 있거나 하품을 쩍쩍해대며 겨우 몸을 일으킬 시간이었다. 하여간 비몽사몽한 정신이었던 덕에 입담에도 홀렸던 것 같다.


신박한 소개팅을 마치고 각자 회사로 가는 길. 카톡이 왔다.

 

“우리 내일 아침 같이 먹을래요?”


엇, 지금 소개팅에서 좀 웃어줬다고 쉽게 보나, 혼자 산다고 띄엄띄엄 보는 건가. 소개팅 첫날에 이런 멘트를 날리다니 까질 대로 까진 놈이구나 싶었다. 곧 뒤이어 온 메시지.


“아침 잘 못 챙겨 먹고 다닐 것 같아서요. 제가 7시 반에 집 앞에 와있을게요. 기사 식당에서 한 그릇 먹고 출근합시다!”


난 또 저녁부터 아침까지 같이 있자는 말인 줄 알았다. 아침밥 데이트 신청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뾰족하게 곤두섰던 마음의 모서리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 남자에 대한 철벽도 무너졌다. 뭐랄까. 아침을 차려주고 싶은 기분이었달까.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기 참으로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남자는 매일 아침 우리 집 앞으로 왔고, 나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현관문을 나섰다. 고백하자면 아침밥도 잘 안 넘어갔다. 그냥 과일주스 한잔이면 충분했는데 그때는 왜 그리 남친이 부르면 부리나케 달려 나갔는지. 자취 10년 차가 되니 매일 아침을 사주는 사람이 구원자처럼 보였나 보다. 무엇보다 내 생에 이렇게 또 따뜻하게 나를 품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컸다. 가까이 두고 매일 따뜻함을 느끼며 살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 욕심이 저녁형 인간을 억지+단기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1년 반 즈음 거의 매일 아침을 같이 먹다가 결국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가 되었다. 결혼을 해보니 남편은 진정한 아침형 인간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아침밥 데이트를 신청한 것도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고운 심성이나 신박한 기획력이라기보다는 아침시간에 제일 멀쩡해서.

완벽하게 속았다!


완벽한 아침형 인간과 완벽한 저녁형 인간인 우리 부부는 동시에 눈을 감고 뜬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만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는 날이 많다. 신혼 초기에는 무서운 장면을 목격한 적도 제법 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거실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책을 보거나 밥을 짓고 있는 남편의 모습은 마치 공포 영화의 인트로처럼 오싹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이토록 부지런한 남편은 퇴근 후 저녁엔 오징어 같았다. 오징어처럼 흐물거리면서 빨판으로 소파에 흡착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신혼생활의 묘미는 오밤중에 영화를 보며 야식 먹는 거라던데, 서운하게도 남편은 10시만 되면 마법에 걸린 듯 잠에 취해 헤롱거렸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3초 컷이라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하긴 남편이 본 나도 한심했을 것이다. 일어나라고 10번을 흔들어 깨우면 9번은 못 듣고 마지막 1번은 듣고 짜증 내며 일어나는 와이프니까. 아침에 잘 못 일어나는 이유를 저혈압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와이프 덕분에 아침식사 담당은 주로 남편이다. 아이 어린이집 등원 담당도 남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말 오전 육아 담당도 남편이다. 세상에, 아침마다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나를 깨우는 것도 남편이네.


결혼 4년 차에 접어든 우리는 여전히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이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 일을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다. 더하여 이제는 ‘우리의 일’도 사랑한다. 세 가족이 함께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하며 헤어져 각자의 즐거움을 누리다, 저녁엔 잠깐이라도 모여서 시답지 않은 말을 털어놓으며 시간을 보내는 우리의 일을 즐기며 살아간다. 해가 지날수록 자유롭고 넉넉한 마음으로 따로 또 같이의 묘미를 즐긴다. 다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느라 조금 불편하고 서운해서 혼자이던 때가 가끔 그립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결혼생활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침형 인간과 함께라 저녁형 인간인 나의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메꿔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기대로 느슨한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  


지금도 월요일 밤 10시 30분, 글을 쓰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이미 꿈나라로 들어가셨다. 글을 다 쓰면 샤워를 하고 내일 아침 준비를 할 남편의 다리를 주물러준 뒤 옆에 곱게 누워야겠다. 내일 아침 어떤 맛있는 음식이 상에 오를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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