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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Apr 05. 2021

고향, 나의 든든한 뒷배

고향이 어디세요?

태어나고 보니 부산 사람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응당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초, 중, 고에 이어 대학까지 부산에서 졸업했다. 그러다 막상 사회로 나왔더니 부산엔 일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대학 동기 대부분 공무원, 은행원, 선생님 같은 직종이 아닌 이상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터를 잡아야 했다. 건축가나 디자이너 같은 직업을 꿈꾸는 동기들은 서울로 해외로 유학을 갔다. 그 바닥에서 통하려면 더 넓은 세상에서 보고 배워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왜 한국, 부산, 내 고향에선 못 하는 거지? 굳이 떠나야 하나? 이 상황이 아쉽고 안타깝고 억울했지만 당시엔 별수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친구들이 각자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 역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 졸업을 서너 달 남겨놓고 서울로 상경한 2007년 겨울. 덩치만 한 캐리어를 끌고 그야말로 대이사를 감행했다. 낑낑대며 도착했던 서울역에는 마중 나온 사람은커녕 눈도 못 뜰 정도의 칼바람만이 나를 반겨줄 뿐이었다. 서울의 겨울은, 생각보다 참 추웠다. 


나는 코딱지만 한 방에서 나는 정말로 코딱지만 한 마음이 되어갔다. 

갑작스러운 취직에 말 그대로 ‘코딱지만 한’ 2평 남짓 고시원에서 서울 살이를 시작했다. 타지에서의 직장생활은 정말로 녹록지 않았다. 콧대 높은 선배들은 뭘 한 번에 가르쳐주는 법이 없었고, 한 번 잘못하면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몰아붙였다. 나는 그렇게 점점 코딱지가 되어갔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 아닌 일도 낯선 땅에 가족 없이 나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서러웠다. 원래 타지 생활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누가 잘해줘도 못 해줘도, 밥을 먹어도 못 먹어도 서러운 것.


닦이고 갈리고 부서질 때마다 엄마에게,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입도 뻥끗 못하고 담아놓았던 억울억울 스토리를 한 보따리 쏟아 내면 속이 다 C1해졌다. 물론 엄마는 열이면 열 “마 때리치아라! 내리온나!”로 마무리하셨지만. 버티다 버티다 인내심의 임계치에 이르면 습관처럼 부산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그 시기는 분기마다 한 번씩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기차표만 예매해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 광안대교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멍을 때리면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고향 친구들과 술이라도 한잔하는 날엔 ‘역시 이곳은 안전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향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쯤으로 생각했던 걸까. 


그로부터 14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타향살이의 애환을 어르고 달래며 살아간다. 

먼발치에서 동경했던 서울은 화려하고도 정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그 서울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화려하지 않고, 서울과 곁을 내어주는 사이도 아니다. 다만 고향이 멀리 있어 불편하고 서러운 일이 많았던 이십 대와는 달리, ‘고향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삼십 대가 되었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든든함, 빈털터리로 돌아가도 엄마품처럼 품어줄 고향 바다가 있다는 안도감. 이런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이 객지생활자의 특혜라 여기면서 ‘너넨 모르지 이 서울 토박이들아?’ 약 올리고 싶은 마음도 드는, 서울시민이 되었다.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풍경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전보다 넉넉한 마음이 된 것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주효했다. 실패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마음 한편에 부산이라는 큰 도시, 큰 바다를 품고 있으니 이 얼마나 든든한가. 이제는 출퇴근길 양화대교를 지날 때마다 향수병에 눈물을 흘리는 대신 감탄사를 흘리며 카메라를 든다. 아주 가끔은 광안대교를 겹쳐 떠올리며 마음을 다독이기도 한다. 


가끔 자취한다는 친구들을 만나면 괜히 밥도 사주고 싶고 술도 사주고 싶고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주고 싶어서 근질거린다. (완전 오지랖 아줌마 같아 보일까 걱정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달까. 객지생활자의 피는 어쩜 동족을 귀신같이 알고 끓어오른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그리고 걸어갈 이들에게 우린 연결되어 있으니 힘내라는 신호를 미약하게나마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 글도 썼다. 


우리에겐 든든한 뒷배가 있다.









멀리 있는 고향 때문에 피곤할 일 많은 여자입니다. 
그래도 고향 덕분에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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