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백칠호 Apr 20. 2021

필기를 잘하는 아이에서
필기를 제대로 하는 어른으로

필기홀릭 남편의 변


* 남편과 필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만 알고 있기엔 아까워서 글로 기록해본다. 


남편은 어려서부터 ‘말 잘 듣는 아이’였다고 한다.  
어른이 시키는 것을 잘 따르는 수동적인 아이였던 남편은, 어른이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 노고에 리액션으로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필기'를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한 최고의 리액션이자 인간관계에 꼭 필요한 도의 정도로 여겼다. 또 칠판에 적혀 있거나 선생님이 쏟아내는 정보를 열심히 받아 적어 두면 결국 언젠가는 내 것이 된다, 성적이 올라가고 더 똑똑해질 것이다, 라는 셀프 희망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대학교 때도 전공과목이든 교양과목이든 심지어 학원 수업을 듣는 중에도 그의 자리는 맨 앞줄이었다.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손을 번쩍 들어 대답하며, 눈치 없이 질문하고, 주옥같은 말씀을 받아 적었다. 필기 모범생이었던 남편의 노트는 시험 2주 전부터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복사되어 널리 널리 퍼져 나갔다. 심지어 대학원 조교가 연구용으로 빌려갔다고 하니 필기 실력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 정도 노력과 정성이면 서울대는 갔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딱히 공부를 효율적으로 한 사람은 아니었다며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팬시점에서 0.1부터 1mm까지, 빨강부터 실버까지 오만가지 볼펜을 사 오는 길부터 행복할 순 없다고. 그냥 필기를 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던 거다. 귀로 들어온 언어를 노트에 새로운 배열이나 표기로 재구성하는 마인드맵스러운 놀이의 재미가 상당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필기’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열심히 받아 적는 적극적 행위이자, 동시에 본인의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화자의 오리지널 정보 그대로가 아니라 청자의 주관적 해석을 글자로 다시 표현했던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석하고 대하는 데에는 부단한 필기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고. 이를테면 아내인 나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지 못해 괜히 마음 상해하거나 대화에서 중요 포인트를 놓치기도 하는 것이다. 남편은 이를 두고 본인 필기 스타일의 문제점이라고 했다. (나도 청자를 고려하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는 셈이니 반성해야 한다.) 


현재 비즈니스 필드에서도 남편은 미친 듯이 필기를 하고 있다. 학창 시절을 지나 사십 대인 지금에도 말이다. 일을 하면서 미팅을 하면서 온라인 강의나 유튜브를 보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필기를 한다. 메모패드, 다이어리, 포스트잇을 활용하던 아날로그 시절을 지나 PDA로 시작된 디지털 필기는 에버노트와 최근의 Notion 그리고 태블릿과 S펜 활용에 이르기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내가 보기엔 거의 필기 중독 수준이다. 남편은 불혹의 필기 홀릭 상태를 돌아보며 최근 새로운 다짐을 했다.  


이제는 필기를 진짜 제대로 해보고 싶단다. 

말 잘 듣는 아이 시절을 지나 남의 말을 제대로 잘 듣는 어른이 되기 위해. 

아직 사랑하는 아내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오올. 필기 홀릭 남편이 혼자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몰랐다. 귀차니즘 지수가 높아 필기를 대충하던 내가 한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와 관련된 무수한 것들을 공부하고 필기하는 모습을 본 남편은, 아내가 많이 변했구나 싶어 짠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겠다는 것이다. 오늘은 아내인 나를 위해 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에세이 소재를 제공했고, 수십 년 뒤에도 아내 말씀을 곰처럼 필기하는 남편이 되고 싶다는데.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다짐, 오래오래 응원할게 여보! 



매거진의 이전글 고향, 나의 든든한 뒷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