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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Aug 18. 2021

어른이 된다는 것

<Love Me If You Dare>  속 명대사



‘내기’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러브 미 이프 유 대어>(2004). 

대학생 때 이 영화를 보고 한동안 아드레날린을 마구 분출하며 들떴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원숙미가 넘치다 못해 콸콸 쏟아지지만) 마리온 꼬띠아르의 상큼한 20대 리즈 시절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운 데다가 일생이 내기인 남녀 주인공의 행태가 아주 볼 만했다. 내기 자체가 아주 짜릿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내재된 내 본능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운전기사 없는 스쿨버스 출발시키기, 꾸중하는 선생님 앞에서 오줌 싸기, 체육 선생님 뺨 때리기, 겉옷 위에 속옷 입기 등 재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8살 때부터 시작된 내기는 20년 동안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내기와 진심, 사랑의 감정 사이를 오간다. 그러다 여자가 남자의 결혼식을 장난으로 망쳐버리면서부터 둘 사이는 멀어진다. 


미치도록 내기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 절교하게 된 것은 시간, 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어가며 어릴 땐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하지 말아야 할 것, 할 수 없는 것들이 그들의 시선에서 묘하게 뒤엉킨다. 그 가운데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계기판은 210까지 있지만 60으로밖에 달릴 수 없는 것.



영화를 볼 당시엔 패기 넘치던 대학생 때라 ‘난 210까지 달릴 수 있다!’며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단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별로 없다. 키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어엿한 직업도 있고 결혼도 하고 엄마라는 타이틀도 있지만 어른이 된 느낌과는 별개다. 이마에 주름살을 발견했을 때 잠깐 아, 나이가 들었네 싶은 게 다다.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다. 지금 우리 집은 여고생 시절 엄마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그대로다. ‘돼지우리’ 같다. 주말 아침에는 더 자고 싶어서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도 일부러 자는 척하며 남편에게 책임을 미루는 철없는 짓도 한다. 남편이 얄미워질 때면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을 잡아 쥐 잡듯이 쏘아대는 건 일도 아니다. (요즘 유치원생도 안 할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오바로크 된 부분이 드러난 채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간 적도 있다. (이건 초딩도 안 할 짓이겠죠.) 


게다가 산만하기까지 하다. 하루 종일 이 생각을 하다가 저 고민을 하다가 그 일을 하고 이것저것 먹는다.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인생 자체가 산만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과생이었는데 예체능 분야를 전공하고 지금은 문과 분야 일을 한다. 어제는 이번 달 카드값에 분통을 터뜨리고 오늘은 다음 달 가족여행 숙박비로 몇십만 원을 기분 좋게 긁는 식이다. 그렇게 산만하고 철없는 아이인 채로 38년을 살아왔다. 그런 나로도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왔다. 어쩌면 산만하고 철없는 아이에게 관대해진 어른이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른이란 뭘까, 어른이 된다는 건 뭐가 변한다는 걸까. 여고생 시절 내가 상상했던 ‘어른’은 하얀색 지프를 몰고 칼단발을 찰랑이는 세련된 느낌의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겁이 많은 아이라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흰색 지프는커녕 운전대도 자주 못 잡는다는 이야기다. 그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고속도로도 신나게 내달리고 비좁은 골목길도 샥샥 지나다니고 브레이크도 스무스하게 밟을 수 있겠지?  멈췄다, 내달렸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어른일까.  


영화를 본 17년이 지난현재로선 영화 속 대사를 긍정적 문장으로 살짝 손보고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0에서 210까지 자유자재로 달릴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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