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여년 전 내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체감상 주변에서 보이는 여성 직장인 중 30대 후반 이상, 그 중에서도 기혼자, 그 중에서도 아이가 있는 사람은 말 그대로 '한줌' 수준이었다. 어쩌다 좀 연차가 있는 여성 선배가 있더라도 10중 9는 아이가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분들이었다.
어쨌든 그 한줌의 30대 후반 이상 여성 선배들의 공통점은 자타공인 이러했다. 일을 무지 잘하고, 술을 왠만한 남자들보다 잘 마시고, 성격이 무지 쎘다. 한마디로 '독한' 여자로 통했다.(여기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반면 나의 업무실력은 그냥 민폐 안 끼치는 수준일 뿐 막 업계에서 회자될 정도가 절대 아니고, 술도 소주잔 2잔만 마시면 화장실로 직행하며, MBTI의 'I'를 담당하고 있는 만큼 조직 내 존재감이 뚜렷한 캐릭터도 아니다. 그래서 늘 이런 생각이었다. 나는 저 나이까지 자리 지키고 있기 힘들겠구나. 비교적 다양성이 있는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은 '특정한' 성향의 모습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겠구나. 나뿐만 아니고 나와 비슷한 성향의 친한 저연차 동료들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나는 술도 그리 잘 못 마시는데, '에이스'도 아닌데, 그냥 저냥 평범한 일개미일 뿐인데 저 '독한 여자'의 대열에 낄 수 있을까? 못 낀다면 나가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그렇지만 나는 어느새 30대 후반이 되었고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직장은 몇 번 옮겼지만,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남들이 말하기에도 그렇고 내가 스스로 나를 생각하기에도 나는 딱히 독하지도 않고 완벽한 건 더더욱 아니다. 막말을 서슴지 않고 해대던 초년생 시절 선배들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게 너무 불편하기만 하다. 초년생 시절 바라보던 고연차 여자 직장인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물론 그분들이 직장생활을 하던 10여년 전과 지금은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부족하다고는 하나 제도도 좋은 쪽으로 많이 개선됐다. 여전히 불이익은 따르지만 그래도 법으로 정해진 1년의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회사가 많아졌고, 코로나 이후로 재택근무나 탄력근무가 많이 보편화되기도 했다. 먹다 토하든 쓰러지든 무조건 마시라고 하시면 마시는 분위기가 만연했던 10년 전과 달리, 여전히 반강제 회식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점심회식을 하거나 술을 마셔도 늦은 시간까지 억지로 마시라고 강요하는 건 '진상' 취급을 받는다.
이런저런 사회의 변화 덕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을 계속해나가기 '예전보다는' 좀 더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 실제로 우리 아이 또래를 키우는 주변 워킹맘 동료들은 비록 하루하루가 고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휴직 후 100% 복귀해서 일을 하고 있다(초등 입학 이후는 모르겠다).
이제는 중간관리자급 이상의 여성직원을 보는 것이 예전처럼 그리 희귀한 일이지만은 않다. 일적으로 다른 업계 사람들을 만나도 중간관리자, 간부, 심지어 임원급에도 여성분들을 제법 만날 수 있다. 물론 숫적으로 따지면 남자 10명에 여자 1~2명인 느낌이지만 10년 전에는 100명 중 1명 될까말까였던 걸 생각하면 개선세는 분명하다.
일하는 여성의 수가 많아지니 그 다양성도 점점 늘어난 것 같다. 그래서 굳이 쎄고, 완벽하고, 술도 엄청 잘 마시고, '왠만한 남자 다 후드려 잡는' 그런 먼치킨 알파우먼이 아니어도 그냥 보통 사람이어도 다른 남자 직원들처럼 사회생활을 지속하게 되는 것 같다. 초년생 시절 나와 같이 '우리는 쎈캐가 아닌데 이 바닥에서 나이 먹고도 버틸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던 동료들은 어느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고군분투하며 이 바닥에서 나이를 먹고 있다. 물론 오랜 사회생활 탓에 자기도 모르게 성격이 강해진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보기에는 초년생 때나 지금이나 그들과 나의 성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독하고 쎄고 털털하고 활발한 여성상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내향인인 나로서는 몹시 불편했다. 나의 태생적인 기질이 마치 '시대착오적'인 태도인 것처럼 오독되는 것이 싫었다. 어릴 때도 "내숭 떤다"며 성격 센 아이들에게 비아냥 당하고 놀림 받았다. 하지만 난 내숭을 떤 적이 없었다. 나도 독하고 쎄고 활발하고 싶었지만 타고난 성격이 이런 것을 어쩌리오. 비록 나이를 먹으면서 많이 사회화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평균 편차 상 독하고 쎈 편이 아니다. 하지만 남자들에게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고 여성성을 어필하려고 얌전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내 성격일 뿐이다.
전통적 여성상을 깨부숴야 한다는 목소리만큼 다양한 성격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이야기도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독하지 않아도 쎄지 않아도 왠만한 남자 다 후드려패고 살지 않아도 그냥 평화주의여도 조용해도 얌전해도 일자리를 잃지 않고 내 자리에서 내 역량껏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쎄지 못하고 완벽하지 못한 내가, 심지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는 것 자체로 다양성을 구현하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