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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나도 모성애를 가질 수 있을까

인생을 다시 살아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by 뚜벅초

테스트기 두줄로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한 가장 큰 걱정은 '나처럼 무미건조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도 모성애라는 게 생길 수 있을까' 였다.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 본 일이 손에 꼽혔으며, 원래부터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지독히도 없었다. 오죽하면 유치원 때 선생님도 가정 통지문에 '남의 일에 관심이 없음'이라고 적었을까. 그나마 나이를 먹고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공감능력이라는 게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정과 사랑이 넘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없는 희생과 사랑으로 한 인간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삶이라니. 도무지 내게는 자신이 없었다.


모성애는 모든 엄마에게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걸까. 주변 사람들을 통해 지켜본 바로는 사람마다 편차가 아주 큰 것 같았다. 어떤 엄마들은 임신 극초기에 초음파에서 들려오는 심박소리만 듣고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모성애가 솟아났다는 경우도 있고,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내 아이'라는 자각이 생기고 모성애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아이를 낳고도 길게는 몇 년이 지나서까지 모성애가 생기지 않아 그저 책임감으로만 아이를 양육했다는 이들도 본 바 있다.

내 경우에는 당연히 임신초기에는 이렇다할 모성애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은 없었고, 당연히 산부인과에서 처음 심박소리를 들었을 때도 다른 예비맘들처럼 감동의 눈물이 나지 않고 오히려 너무 우렁찬 소리에 '증기기관차 소리 같다'는 생뚱맞은 생각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대로 모성애는 커녕 내 자식이라는 자각조차 느껴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나마 태동이 느껴지면서부터는 조금씩 임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나름의 애착도 생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완전한 '모성애'였다고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것 같다.


우리 엄마 역시 정이 많거나 희생적인 '전통적인 어머니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성격이었다. 스스로도 '난 드라이한 성격'이라고 강조할 정도로 냉정했고 자식 일이라고 만사를 제치고 나서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가정주부보다는 멋진 옷을 입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마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스스로 말씀했던 것처럼) 억지로 떠밀려 결혼을 하기보다는 '커리어 우먼'으로 자유롭게 사는 게 더 잘 맞는 성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쨌거나, 나 역시 그러한 엄마의 성향을 물려받아 상당히 냉정하고 건조한 성격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요즘 육아는 과거에 비해서도 훨씬 부모의 역할이 많아졌고,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부모가 함께하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니 과연 나라는 사람이 그 과정을 온전히 (아이에게 성질을 내지 않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 역시 아이와 단둘이 씨름하는 고단한 삶에 금방 권태를 느끼고 아이에게 짜증을 내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인내심이 바닥나 복직, 휴식 등을 핑계로 아이 곁을 떠나게 될 것만 같았다.


걱정반 기대반인 심정으로 기다리던 분만 예정일은 다가왔고, 나는 다행히 별다른 돌발상황 없이 무사히 아기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술을 했기 때문에 산통을 겪지도 않았고, 비록 마취가 깬 뒤 통증은 좀 있었지만 의료진들의 신속한 대처로 그럭저럭 참을만한 수준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어디가서 ‘무용담’으로 삼을 만한 고통도 없이 이렇게 상대적으로 무탈하게 아기를 만나면 모성애가 싹틀 여지가 더 적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실제로 아기를 보고 너무 예쁘고 신생아실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호들갑'을 떠는 양가 부모님과 남편의 반응과는 달리, 정작 나는 그냥 열달만에 드디어 만난 아이에 대한 반가움과 함께 '이렇게 큰 아이가 내 뱃속에 있어서 그렇게 숨쉬기가 힘들었구나' 라는 생각 정도가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본격적으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시작한 건 출산한지 3일이 지나 모유수유를 시작했을 때였다. 아직 링거도 안 뗐지만 거동이 많이 어렵지 않아 수유 연습을 시작했는데,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 엄마 젖 먹기를 너무 능숙하게 하는 아기의 모습에서 생명의 경이로움과 함께 '이 존재를 내가 지켜줘야겠다'는 사명감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형처럼 동글동글한 머리와 볼을 열심히 움직이면서 젖을 먹고, 울다가도 내 품에만 안기면 바로 조용해져서 편안히 잠을 자는 모습을 보니 '나만큼 이 아이도 나를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렇게 너무도 연약하고 순수한 존재라면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중 받았던 심리상담 중 상담 선생님이 아기와의 애착 형성에 모유수유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게 생각났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걱정했던 젖몸살 등 트러블도 나지 않아 나는 몸조리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아이에게 수유를 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지냈다. 아직 실밥도 풀지 않은 산부인과 입원 중에도 꿋꿋이 새벽 수유를 가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어릴 때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간다면, 정신차리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서툴렀던 교우관계도 더 현명하게 할 것 같고, 어리석은 선택으로 놓친 기회들도 더 완벽하게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이를 만나고, 나는 어쩌면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인 '인생을 다시 돌아가 살 수 있는' 간접적인 기회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유전자를 반쯤 물려받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닮은 존재에게 내가 겪은 것보다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고,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 내가 받고 싶었던 지지와 응원을 줘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기회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과 는 달리 내 자식은 나보다 행복하더라도 그 어떤 질투나 소외감도 들지 않으니까.


아직 육아의 넓은 광야에 겨우 첫 발자국을 낸 수준이지만,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을 겪고 나니 일종의 자신감이 생겼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희생을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안다. 실제로 자녀에게 상처를 준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무척 사랑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방법이 적절하지 못했고, 때로는 일시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화풀이를 하거나 심지어 구타를 할 뿐이었을 것이다.

이제 내 과제는 애정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그리고 감정 다스리기일 것이다. 아이의 책임이 아닌 오로지 내 감정으로 인해 아이에게 상처 주지 않기. 습관적으로 화가 날 때마다 심호흡을 하거나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등 연습해 왔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임신, 출산이라는 미지의 영역이 두려워 아이를 갖고 싶으면서도 망설이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전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걸 자주 봤다. 과거와 달리 부모의 역할이 너무도 커진 요즘, 더군다나 부모로부터 받아본 방식을 대물림하는 것도 아닌, '우리 때'에는 받아본 적 없는 사랑과 섬세한 케어를 아이들에게 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 80~90년대생 젊은 부모들은 출산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체벌이 당연했고, 구타 수준의 단체기합과 때로는 부모의 감정 섞인 매질이나 화풀이도 받아들여야 했던 많은 어린이들은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서야 뒤늦게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수많은 '부당한' 체벌들이 요즘 기준으로 보면 학대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런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일부 부모들은 지나칠 정도로 자녀에게 과잉 보호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적절한 훈육을 '애 기 죽일까봐' 못 하고 기본 예절조차 가르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니다.


받아보지 못한 것을 만들어 베푼다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이유로 비출산을 선택하는 것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자녀를 원하는데도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아닐까. 물론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아직 생기지 않은 아이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갖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보지 않은 사랑'을 베푸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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