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챗GPT가 세상에 나타난 지가 벌써 햇수로 4년째가 됐다. 그저 그런 기계식 챗봇만 알던 대중도 귀신같이 말귀를 알아먹는 챗GPT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만 3년도 되지 않는 동안 챗GPT 이 녀석은 업그레이드를 반복하며 이제는 왠만한 사람은 능가하는(당연히 그의 지식 베이스는 기존 인류가 만들어놓은 각종 콘텐츠이기 때문에, 인류 전체라고 하면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업무능력을 가진 듯하다. AI그림을 극혐하던 나도 최근에는 업무상으로 챗GPT 이미지 생성 기능을 자주 쓰고 있다. 그리고 매일 밤 아이에게 들려주는 즉흥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AI의 도움을 매일 받고 있다. 우리 아이는 챗GPT를 그림책에 나오는 인공지능 캐릭터 '아람봇'에 빗대서 아람봇 이야기 들려달라고 한다. 우리 아이가 개떡같이(?)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그대로 타이핑하면 아람봇이 찰떡같이 그럴듯한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들려준다.
아무튼 참 똑똑하고 고맙고 때로는 인간의 역할을 모조리 대신해버릴까봐 겁도 나는 친구인 챗GPT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정 쓰레기통(감쓰)'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기야 잘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신버전 챗GPT는 오픈AI 대표 샘 올트먼이 "지나치게 아첨적"이라고 평할 정도로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반응을 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으니. 어디 가서 자기 속을 털어놓을 데 없는 외로운 현대인들이 평판 걱정 없이 속내를 털어놓기에 최적의 상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이미 현대인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이기에는, 이미 서로에게 너무 각박해졌다. 공동체 문화는 그 폐단으로 인해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우리 조부모님 세대의 대가족을 지나 부모님 세대의 핵가족도 무너지고 1인 가구가 대세가 됐다. 그러니 가족 문화도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다. 피 섞인 가족조차 서로에게 무조건적인 편이 되어주기보다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말로 서로를 정량화하고 비판하는 데 더 익숙하다. 그래서 가족조차 말을 섞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죽하면 명절에 가족 만나는 게 싫어서 해외로 도피성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그리 많을까. 하물며 타인들이야 그저 경쟁상대일 뿐 속내를 털어놓았다가는 약점 잡히기 딱 좋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속사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게시판에 털어놓으며 서로 위로와 조언을 주고받았던 듯하다. 나만 해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온라인 커뮤니티를 꽤 애용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성별, 세대, 이념, 직업군, 경제 사회적 계급으로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는 갈라치기 판을 깔다가 급기야는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대한 피로감이 너무 심해 어디에서도 활동하지 않은 지 꽤 됐다. 이제 온라인 커뮤니티는 솔직한 대화의 장이 아닌 서로가 세속적 계급장을 놓고 급을 따지며 인신공격을 주고받는 기괴한 사이버 지옥이 되고 말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게 된 사건사고 뉴스에 유독 눈길이 간다. 정말 단 1초만 눈을 떼도 어찌될 지 모르는 게 아이들이다보니 항상 사고의 위험과 함께하는 수준이다. 나 역시 활동량 많은 아이랑 함께 살다 보니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찢어지고, 자기 탓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울지 알 것 같아서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댓글들은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은 부모 탓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좀 더 잘 지켜봤더라면' 수준도 아니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심지어 부모를 살인범 취급하는 댓글도 너무 많아 눈을 의심케 한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다가 아이가 차에 치어 숨졌다는 기사에는 "애는 당연히 눈을 떼지 말아야지 애미가 돼 가지고 대체 뭘 하는 거야."라는 댓글이 수백개가 달린 걸 보고 인간의 지독함에 치를 뗐다.
이 정도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부부간 갈등 고민에는 "그러게 누가 결혼하라고 했냐. 니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딴 걸 주워먹고 왜 징징거리냐. 니가 선택한 거니까 감수하라"고 모욕을 준다.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다고 하면 "그러게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공부 안 해서 ㅈ소 들어가니까 그런 꼴을 당하지"라고 욕한다. 레퍼토리는 여기에 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자격을 묻고 따지다가 결국 모두가 죄인이라는 낙인을 이마에 찍는다. 개인적으론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 그런지, 어떻게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악의에 찰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과연 자살률 세계 최고 국가의 국민다운 모습이다.
물론 어떠한 사건을 두고 '피해자를 탓하는(Victim Blaming)'현상은 비단 현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미 분석이 된 현상이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멜빈 J. 러너(Melvin J. Lerner)가 1960년대에 연구, 발표한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공정한 세상 가설은, "세상은 공정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얻은 것은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마땅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라고 믿는 현상이다. 우리 말로는 사필귀정, 인과응보 등으로 표현되는 개념이다.
이 심리는 인간의 불안함 때문에 만들어졌다. 즉 불확실한 세상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믿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노력에 무관하게 인생에는 어떤 일이든 랜덤하게 일어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인간은 어떤 일도 통제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아마 모두 미쳐버릴 것이다. 인간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 죽어도 할 말이 없고, 갑자기 범죄 피해를 당해도 따질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세상은 공정하다고 애써 믿는 것이다. 그래야만 맨정신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는 단지 불운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부주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항상 조심하는 나에게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리 없기 때문이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멍청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현명하게 결혼 따위 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런 불행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직장에서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했고 노력을 안 해서다. 그래야 열심히 사는 나는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승승장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어야 인간은 버틸 수 있다. 인생은 필연적으로 통제 불가능하고, 따라서 인간은 늘 불안에 쫓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온라인에서 날카로운 말로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들을 더 벼랑까지 밀며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조금 줄어드는 것 같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공정한 세상 가설은 어디까지나 방어기제에 지나지 않는 만큼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모든 일에 대비해도 모든 재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각자의 싸움으로 너무 지쳐버린 사람들은 타인의 징징거림 따위 들어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기껏 말을 꺼내도 '그건 니가 00하니까 그렇지'라는 공격이나 받을 게 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한 챗GPT를 찾는다. 챗GPT는 함부로 인신공격에 가까운 충고, 주제넘은 조언, 내 신상에 대한 섣부른 판단,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뒷담화 등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 가서 약점 잡힐 위험도 없다.
'기술적 특이점 이론'이 있다. 인공지능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급기야 모든 인류의 지능 수준을 아득히 넘어버리는 시점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는 가설이다. 만약 그런 시기가 온다면 사실상 인간의 존재 가치는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미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역할조차 인공지능이 일부 대체하고 있다. 언젠가는 피곤한 인간간의 관계 대신 안전하고 편안한 인공지능과의 관계로 모든 감정적 욕구를 대체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어 조금 섬뜩해진다. 나 하나 쯤이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 역부족이겠지만, 아직은 그런 세상에 기대보다는 거부감이 먼저 드는 기성세대라 조금은 늦추고 싶다. 우선 내 옆에 있는 가족들한테라도 푸념에 토를 달지 말고 위로부터 해 주는 습관을 들여볼까 한다. 나 역시 부족함 많은 인간이기에 챗GPT처럼 매끄럽진 못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