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중 폭력, 폭언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있어 트리거가 될 수 있음 유의 바랍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힘겹던 시절, 친한 친구들과 퇴근 후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혹은 커피나 디저트라도) 힘든 일에 대해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 다급하게 자리를 피하거나 "왜 맨날 그런 소리를 하냐"고 애써 화제를 돌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때는 참 그 친구의 태도가 싫었다. 사람이 어떻게, 맨날 하하호호만 하고 살아. 어떻게 맨날 즐거운 얘기만 해. 실제로 그 친구는 우리를 만날 때 '희노애락' 중 '락'만 공유하고 싶어했다. 어느 식당이 맛있고, 요즘 화장품은 어떤 색이 좋고, 남자친구가 나한테 뭘 잘해줬고, 고양이가 이런 귀여운 행동을 하고... 하지만 인생의 성장통을 세게 맞고 있던 내게 그런 이야기들은 너무 공허하게만 들렸고 대화 도중 속으로 딴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나는 결국 일주일에 두세번씩 이어지던 모임 약속 중 세 번 중 두 번은 거절하고 한 번은 1차만 하고 돌아오는 '비싼 척'을 하게 됐다.
모임은 결혼출산을 계기로 멤버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며 자연스레 해산됐다. 나를 뺀 나머지들은 만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질풍노도같던 20대 후반 시기를 지나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문득 그때 친구의 반응이 떠올랐다. 나도 누군가의 신세한탄이 듣기 싫다고 생각할 때부터.
나는 왠만해선 남의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듣는 편이다. 거절을 못....한다기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입장도 있는데 굳이 면박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관심 없는 주제가 나와도 예의상의 리액션은 한다. 그래서인지 직장에서는 항상 하소연을 나에게만 끝도 없이 매일같이 하는 사람이 한 명씩은 나타난다. 심지어 이직을 해도 다른 사람이 또 그러고 있다.
하다하다 도가 지나치면 아주 무성의한 대응을 하거나 수 시간 지나 답장을 하는 등 완곡한 표현을 하면서 거리를 둔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강적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상태가 나아지거나 하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기 때문에(그리고 의외로 이 사람들의 신세한탄은 그냥 습관적인 것이라 상대방이 듣지 않아도 그런가보다 하면서 잊어먹는 경우도 많다. 듣는 사람만 안절부절했던 거지.) 자연스럽게 관계가 종료되곤 한다. 전문용어로 '감정 쓰레기통'인 것이다.
희노애락 중에 즐거움만 공유해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다. 의도적으로 피상적인 얘기만 골라서 하는 관계도 피로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슬픈 일도 있고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도 있다. 그걸 굳이 없는 셈 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세상은 긍정적인 이야기보단 부정적인 얘기로만 가득 차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긍정적인 얘기를 하면 잘난 척하네, 가식떠네 하는 얘기까지 나온다. 온라인에선 알고리즘도 한몫한다. 부정적인 정보를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에 부합하여 귀신같이 남 안 된 이야기만 코앞에 들이민다. 심지어 유튜버들도 한때는 '부자 된 얘기', '잘 먹고 잘 사는 얘기'를 올리다가 이젠 '이혼한 얘기', '중년에 파산한 얘기', '비혼/결혼해서 후회하는 얘기'를 올리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고된 세상사(?)에 이런 얘기는 피로하다. 심지어 불안감까지 부추긴다. 지금 잘 사는 것 같아도 너 역시 언젠가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무언의 협박마저 느낀다. 심지어 그 심리를 이용해서 이 종목을 사고 이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장사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근데 그런 걸 해서 노후 대비가 된다면 우리 부모님도 전재산 날려먹지 않았겠지.....
아무튼, 한국만 그런건지 모르겠는데 충분히 갖출 것 다 갖추고 누릴 거 다 누리는 사람들조차 자기 인생은 시궁창(?)이라며 신세한탄하는 건 보기가 많이 안 좋다. 인생에 뭔가가 마음에 안 들면 고치려고 노력을 해 보는 게 먼저일텐데, 물론 안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습관성 신세한탄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굳이 그걸 고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피해자성에 머물러 있는다. 그 상태에서 신세한탄을 하며 주변의 동정과 관심을 받는 것을 은근히 즐기기도 하는 것 같다.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 정서다.
온라인에서 육아 얘기를 줄이게 된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이나 다름없는 육아의 고충, 워킹맘의 고충을 너무 과하게 쏟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솔직히 그런 이야기는 이미 너무 과하게 유통되고 있다. 굳이 나까지 가세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힘들 땐 다른 워킹맘들이나 육아맘들의 사례를 찾아보곤 했는데 99%가 다 힘빠지는 얘기뿐이라 더 우울해진 적이 많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나도 별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물론 이제 '집중 육아기'가 끝나가고 있는 덕분도 있지만 그 이전에 답도 없는 신세한탄은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힘든 사람만 늘린다는 걸 자각하게 됐다. 신세한탄은 속이 시원해지기는 커녕 더욱 부정적인 정서를 강화하고, 그걸 들은 사람도 부정적이 된다.
우리 엄마도 내가 어릴 때부터 습관성 신세한탄을 했다. 대상은 주로 자신의 남편(아빠)이었고, 내가 왜 저런 인간을 만나서 애가 있으니 갈라서지도 못하고... 로 되풀이되는 한탄을 아침 먹고 한번 점심 먹고 한번 자기 전에 한번 하는 식으로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정 내 노동과 소모되는 비용은 엄마가 전부 벌어서 부담했고 '어깨가 무거워 죽겠다'는 신세한탄만 할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빠가 술을 먹고 폭언을 해도, 집안 살림을 다 때려부숴도, 나에게 죽으라고 폭언을 하며 나를 구타해도(사유는 아마도 편도 10시간에 달하는 할머니 집 안 따라간다고 해서였던 것 같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부부사이는 굳건(?)했다. 생각해보면 결혼 초기부터 가정 경제는 우리 엄마가 다 책임졌고 모든 일도 다 엄마가 했는데 이혼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35년에 달하는 지긋지긋한 신세한탄은 내가 결혼을 하면서 분가를 한 뒤 자연스럽게 집이 팔리면서 뿔뿔이 흩어지며 끝이 났다. 드디어 (서류상 이혼도장은 안 찍었지만) 남편과 따로 살게 된 엄마는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살아보니(??) '절대 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내가 충분히 답을 찾아보지 않고, 막연히 두려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던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신세한탄만을 반복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서, 욕을 먹을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말이다. 나 역시 그런 시기를 보냈고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다 내 선입견이 만든 것들이었다. 나에게 매일같이 메신저로 상사의 말 하나하나를 욕하던 동료들은 퇴사를 하면서 연락이 뜸해졌고 엄마는 따로 방을 얻어 나가 살면서 남편 욕을 하지 않게 됐다. 나는 아이가 좀 자라고 그 동안 육아에 집중하느라 하지 못했던,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들을 하나씩 시도하면서 육아 스트레스에 대한 푸념과 한탄이 줄어들게 됐다.
인생은 그렇게 장밋빛이지만도 않지만, 또 그렇게 무시무시한 맹수들만 드글거리는 길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