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에 처음으로 수박 한 통을 샀다.
보자마자 눈에 띄는 놈으로
26살에 길을 지나다가 수박 한 통을 샀다.
누가 채갈까 봐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30살에 내 인생 마지막 수박 한 통을 샀다.
두 번이나 잘못 산 수박 덕분에
배탈도 나고, 안목이 없다고 혼나기도 하고, 좋은 수박 고르는 방법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니 이번 수박은 좋은 놈일 게 분명하다
집에 오자마자 손부터 씻고, 나무 도마 위에 깨끗이 씻어낸 수박을 올려놓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흥부가 박을 썰듯이 한쪽 면을 잘라본다
'이번에도 실패면, 마트에 찾아가서 따지고 말 거야. 어디 농장인지 찾아서 수박 농부도 혼쭐 낼 거야'
마법주문도 아닌 것이 칼날의 힘에 달라붙어 쩍 갈라졌다
"아...."
남들이 수박 색깔도 보고, 똑똑 두들겨 소리도 들어보고, 시식도 해보며 고르고 골라서 가져갈 때,
한 번도 맛 좋은 수박을 먹어본 적이 없는 내가 어찌 잘 고를 수 있겠나 위안을 해보지만
쌓였던 씁쓸함이 올라오는 건 막을 길이 없나 보다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캠핑 가는 남편,
아이 생일 때면 해년마다 가족사진 찍어주는 남편,
퇴근할 때마다 육아로 고생한 아내에게 커피셔틀 해주는 남편,
수많은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많고 많은 남편 중에 내 남편은 없다.
속이 텅 빈 수박은 먹을 것도 없지만, 버리기도 아깝다.
10년이나 지났는데 그때 그 수박을 원망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남은 세월이 길어서도 아니고,
지나간 세월이 후회되서도 아니다.
그 수박 얘기를 하면 또 할수록 '내가 그 수박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나에게 하나뿐인 그 수박 놈을 상기시키는 이 헛된 뒷담화.
마지막으로
남은 수많은 세월을 잘 부탁한다는
나의 아부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