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좀처럼 버스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기어코 버스는 신호란 신호에 다 멈춰 서고 겨우겨우 나아갑니다.
마음이 급할 때 걸리는 빨간색 신호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멈춤 신호를 받으면 내심 귀찮고 불편합니다.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있는데 저 신호가 내 삶의 방해꾼이 된 것 같습니다.
얄미운 마음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데 그 신호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과 보행자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의 멈춤으로 누군가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다리면 순서가 되어 나아갈 수 있지만 내가 더 빨리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잠재의식 속에서 오감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나쁘다고만 할 순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목표가 몸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재촉하고 채근하는 마음 뒤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목표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을 의식하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르지만
우리는 목표가 있는 한 삶을 살아내는 용기를 얻습니다.
살면서 목표를 향한 욕망이 얼마나 있었나 돌아봅니다.
목적지에 시간 내로 도달하고 싶은 사소한 욕망 말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인생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 본 적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이 나이 먹도록 별로 큰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살아왔던 것 같네요.
인생은 별 의미 없이 산다 하더라도 산다는 것 자체가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인생의 부조리를 통해 희망을 역설합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의미 없는 노동이지만 비극을 그저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카뮈의 역설이 때론 공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의문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저 살아 내는 것으로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하기에는 인생의 시간과 공간은 저마다 다릅니다.
무언가를 이룬 사람,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 도전이 즐거운 사람과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나이만 들어 할 수 있는 것도 여유도 없는 사람과는
인생에 대한 태도와 답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을 돌아봐도 늘 같은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젊을 땐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인생의 의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불안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방황과는 사뭇 다릅니다.
자고 일어나도 시간이 제법 흘러도 비슷한 불안에서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잠시 멈춤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남은 시간에 대한 여유가 없어 멈춤이 불안하긴 하지만
멈추지 않은 내 삶은 망가지거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으리라 생각 듭니다.
즐거운 멈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공황장애로 5년 동안 약을 먹고 있다 보니 나에게 즐거움이란 머나먼 감정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무책임하다고 불성실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먼 미래의 우리는 그저 21세기를 함께 보냈던 시절 인연일 뿐
결국 내 행복은 내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그래서 그 멈춤의 시간 동안 더 많이 고민하고 읽고 쓰기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젊은 시절 탁월한 철학서를 발표하고 유명인사가 된 비트겐슈타인은
세 명의 형을 자살로 잃고 자기 자신도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은둔생활을 자처했습니다.
그런 그가 60세를 넘어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주치의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
내 인생 마지막 고백이 이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