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걷는 걸 좋아합니다.
한때는 버스 두세 정거장 정도는 그냥 걸었습니다. 천천히 흐르는 풍경이 좋았습니다. 분주한 시내에서는 거리의 풍경을 즐겼고, 한적하고 조용한 거리는 차분한 분위기에 흠뻑 젖었습니다. 걸음은 음악과 참 잘 어울립니다. 분위기나 속도에 따라 리듬이 달라집니다. 때로는 클래식하게, 때로는 비트 있게 걸으면서 다양한 장르를 연출합니다. 걷다 보면 음악이 듣고 싶어 질 때가 많습니다. 가끔은 음악을 듣고 싶어 집을 나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바깥 활동이 줄어듭니다. 불필요한 이동시간을 줄이고 이동에 드는 에너지를 절약합니다. 한때는 그렇게 움직이고 돌아다녀도 피곤한 줄 몰랐지만, 지금은 어딜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옵니다.
요즘은 걸음이 많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많이 걸어 다닌 것 같아도 걸은 곳은 항상 거기서 거기입니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까지, 집 근처 공원, 자주 가는 식당만 생각납니다. 생활 반경이 조금씩 비좁아집니다. 이제 걸음이 넘치는 삶은 아닙니다.
하지만 걸음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는 누구나 비슷합니다.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지난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잊고 지냈던 옛 추억을 하나씩 꺼내 봅니다. 참 많은 추억이 섞여 있었지만, 친구가 떠올린 가장 인상 깊었던 추억은 무작정 떠난 남해 트래킹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울창한 숲길에서 풀독을 맞으며 걸었고 잠시 내리는 비는 온몸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내리쬐는 햇빛에 피부는 벌겋게 익어갔으며 따라다니는 날 파리는 입맛을 잃은 두 사내에게 씁쓸한 간식이 되었습니다. 하루를 더 걷자고 약속했지만 의지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음 날 집으로 향했습니다. 분명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딱히 즐거운 기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준비 없이 걸었던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걸음은 생각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철학가들은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숲을 걸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소요학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소요(逍遙)는 정해진 것이 없이 무작정 걷는 행위를 말합니다. 물론 정해진 길을 걷는다고 사고가 얼어붙는 것은 아닙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매일 한 시간씩 정해진 길을 걸었습니다. 딱히 그 외에는 다른 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 위에서 이성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걸음엔 따로 법칙이 없습니다. 딱히 정해진 무게감이나 속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에 좋습니다. 감정을 따라 걷다 보면 조금씩 변하는 생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화가 나고, 슬프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좋습니다. 지나가는 풍경의 흐름 속에서 감정을 추스르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걸음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걷다 보면 문제를 대하는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용기가 생기거나, 받아들이게 되거나, 혹은 다른 방향의 길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걷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거나 풀리지 않는 문제로 고민할 때마다 걸음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무심하고 힘없는 발걸음 속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걸음은 내 인생의 다양한 고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잃어버렸던 기억, 꿈, 눈물과 웃음이 남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인생을 살았기에 걸음은 더욱 특별합니다. 나는 이미 지구 반 바퀴는 걸었을 정도로 살았습니다. 많은 곳을 걸은 건 아니지만 나의 걸음에도 제법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이제 그 기억을 더듬으며 잊었던 시간을 채우고자 합니다.
지나온 시간이 마냥 즐겁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부끄러운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때의 생각과 생각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됩니다. 다만 부족한 생각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걸었다면 조금씩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으리라 위로해 봅니다.
걸음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다녀 간 곳, 그 길 위에서 떠올린 생각이 인생입니다. 내 발걸음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것은 오래된 일기장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글을 쓸수록 그 의미를 찾아가는 모험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40대 중반, 시간이 갈수록 힘들고 우울한 나날이 짙어지는 것 같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꽤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아 위로를 받습니다.
멈춰 서는 곳이 목적지라면 걸음은 과정입니다. 결과만 바라보다 보면 과정은 점점 잊어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걸음이 희미해지는 이유입니다. 걸음을 목적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 도착하는 것이 아닌 두 발을 움직이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삶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이루며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