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공대졸업생이 경복궁 영어해설을?

경복궁 영어해설반 신청기

by 선율

현재, 나는 우리문화숨결이라는 자원봉사 단체에 소속되어 있고, 월 1회 경복궁 한국어 해설을 하고 있다.


수학과 과학을 유난히 좋아해 공대를 졸업했고 엔니지어로 지금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내가, 학교다닐때 그토록 싫어했고 재미도 없었고 전과목 평균점수를 깎아먹던 역사에 어느 순간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후, 역사책을 찾아읽고 EBS 강의를 들으며 한국사 자격증을 땄고, 30-40만원의 교육비를 내며 1년과정의 궁 해설사 과정까지 수료했고. 그 후, 돈 한 푼 받지 않는 순수한 자원봉사로, 수원집에서 경복궁까지 왕복 4시간을 오가며 지금까지 한국어 해설을 하고 있을 줄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신기한 것은,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멀게만 느껴졌던 '영어로 경복궁을 해설하는 일'을 위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영어해설반에 올해 드디어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형편없는 발음과 부족한 영어실력, 그리고 그동안 영어를 쓸 일이 전혀 없었기에 1년 동안 망설이며 고민하다 정말 큰 용기를 내어 이번에 지원서를 냈다.


한국어 해설은 약 12년 전에 시작했다. 1년동안 해설사 과정을 수료하고 1~2년 활동을 하다 결혼을 하고 동시에 임신을 하면서 그만 두게 되었다. 임신한 상태로 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해설을 하기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쉬기 시작한 게 아이가 태어나 어린이집을 거쳐 초등학교에 들어갈때까지 계속되었다. 직장과 집안일, 육아만으로도 허덕이던 그 동안에는 다시 해설을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가슴 한켠에는 늘 이런 반복되는 일상 이 외에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고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결혼전에 했던 경복궁 해설 활동이 떠올랐다.


결국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해, 더 미루면 안되겠다 싶어 용기를 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 해설 메뉴얼을 준비 하고 선배 해설사 앞에서 시연 통과 후, 다시 경복궁 해설을 시작했다. 그게 벌써 2년전의 일이다.


다시 한국어 해설을 시작하고 보니 10년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내국인 관람객이 줄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오후 시간대에 20-30명의 관람객을 데리고 한국어 해설을 하는게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보통 10명 이하가 모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동남아나 중국, 일본 그 외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관람객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래서 한국어 무료 해설표지판 앞은 한산한 반면, 외국어 해설 표지판 앞은 늘 외국인 관람객으로 북적인다. 이제는 한국어 해설을 들으시라고 오히려 홍보를 해야 할 정도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서인지 10년 전에는 없던 영어해설반이 3~4년전쯤 자원봉사 단체 안에 생겼다. 비록 생긴지 3년밖에 안된 해설반이지만 스터디도 알차게 운영되고 있고 선생님들도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모습이 간접적으로 내 눈과 귀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영어 실력으로 무슨...내 발음으로 어림없지...'라는 부정적인 생각도 함께 들며, 지원 하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10월말 한국어 해설사 수료식날, 영어해설반을 홍보하시던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어 못해도 됩니다. 열정만 있고 출석만 잘하시면 누구나 영어 해설 할 수 있습니다!!! 해설 메뉴얼도 다 알려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많이 많이 지원하세요!!!


우와! 다 알려준다고? 영어 못해도 된다고? 이 말은 꼭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영어 때문에 망설이던 나에게 용기내서 지원해보라는 신호 같았다. 메뉴얼도 다 준다고? 그럼 한국어 해설 메뉴얼이 A4 18~20페이지 정도 됐으니 영어해설은 10페이지 정도로 줄이고 한달에 한 페이지씩만 외우면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해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래 한번 해보자!!! 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생각으로 지원서를 냈고 정식으로 영어해설반 카페에 가입이 되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자기소개였다. 먼저 올라와 있던 기존 분들과 신입분들의 소개글을 훑어봤다.


해외 업무를 맡아 평상시 영어를 자주 쓰는 분, 해외 출장이 잦은 분들이 많았고, 관광 통역 안내사 자격증을 가진 분들도 여러명 있었다. 그 외에도 궁 뿐 아니라 여러 문화재와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들도 많았다. 나처럼 영어와 거의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이럴수가...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거 진짜 맞아...? 화려한 이력에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내 소개부터 썼다. 영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는 걸 먼저 밝히고, 마지막에 각오를 한마디 적었다.


-'잘하는 사람은 끝까지 남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잘할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남아있으면 비록 시간은 걸릴지라도 결국 잘하게 될꺼라고 믿습니다.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함께 하는 분들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영어 해설반의 규칙은 매월 두번, 주말 오전 9시~12시까지 진행되는 스터디 참석(불참시 녹음본 공부후 인증)과 신입기수의 경우 하반기 중 1회 외국인 해설을 해보는 것이다.


그동안의 고민이야 어찌됐든 난 지원했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을 쓴 작가 마이클 이스터는, 편안함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안주와 편안함을 버리고,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는 메세지다.


20년 이상 근무한 회사와 이제 훌쩍 커버려 내 손길이 크게 필요하지 않는 아들만을 바라보고 산다면 삶은 너무 무료하고 심심할 것이다. 더 젊게, 더 생기발랄하게, 더 의미있게 살고 싶은 나에게 지금 이 도전은 아주 낯설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아들이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1년 후, 당당히 외국인에게 영어로 해설을 하고 있는 내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