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룬 게 다 운빨이라고?

책 리뷰: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by 선율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우연히 김현철 교수라는 인물이 초대 손님으로 출연했다. 연대 의과대학 졸업 후, 연대 경제학 석사와 미국 콜롬비아대 박사취득, 미국 코넬 대 경제학과 교수 및 홍콩 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듣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지는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런 그가 인생의 성공에 있어서 대부분이 '운'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큰 호기심이 생겼다. 어떻게 이런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져 그가 쓴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인생의 성취가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요소들, 즉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부모를 만났는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가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세계은행 연구를 인용하며 출생 국가만으로도 개인의 소득과 기대수명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이는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상당 부분이 이미 결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세계 상위 20%에 해당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부모를 만났는지는 유전과 환경이 결합된 요소로 이 또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건강 역시, 태어난 나라와 가정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개인의 노력으로 예방할 수 있는 환경요인은 4분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에 의문을 던진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회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해 병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경험은 저자가 의학에서 경제학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국가 정책의 중요성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통해 국가 정책만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본인의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고는 결국 홍콩에서의 안정적인 교수직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정책 전문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태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에 걸쳐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임신과 출산, 육아, 교육, 직장 생활, 실직, 노후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마지막에 제시한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맞벌이 부부가 제대로 본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입주 가사도우미를 고용하자는 주장인데, 실제 저자도 부부 모두가 박사과정을 거쳐오면서 두 아이의 육아가 가장 큰 문제가 되었기에, 미국에 있다가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사용할 수 있는 홍콩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다. 임금이 센 홍콩에서 가사 입주 도우미는 최저 시급이 아닌 별도의 급여가 산정되어 있다. 실제 우리 돈으로 80~100만 원, 입주부대비용까지 다 해서도 최대 150이 넘지 않은 돈으로 입주 도우미를 구할 수 있는 제도이다. 필리핀을 포함 동남아 지역의 월급이 2~30만 원대인걸 감안해 보면 입주 도우미를 원하는 인력도 많기 때문에 서로 윈윈 전략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직종에 상관없이 200만 원이 넘어가는 최저시급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입주 도우미는 일단 구하기도 어렵고, 구한다 해도 300만 원 이상의 급여를 지불해야 하니 웬만한 맞벌이 부부는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만약 저자가 제시한 이 정도 수준의 비용으로 육아를 해결할 수 있어 경력단절 없이, 아이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 없이 맞벌이를 선택할 수 있다면, 육아로 인해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일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이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편, 책의 후반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정책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한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정책이라도 실제로는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직관이나 당위성에 의존하기보다 데이터와 실험을 기반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지금의 내가 누리는 삶이 온전히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환경 역시 많은 부분 운에 의해 주어진 것일 수 있으며, 그렇기에 더욱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운이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을 단순히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만 판단하여 그들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건 잘못된 시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나를 포함해, 자신의 성취가 온전히 개인의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 믿으며 타인을 쉽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본인 아이에게 하고픈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인생성공의 8할은 운이란다. 우리 힘만으로 이룬 게 아니니까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그리고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좌절하지 말자. 운이 좀 나빴던 것뿐이니까. 또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살자꾸나. 혹시 스스로 성취한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렴.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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