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귀환
1. 티모 톨키(Timo Tolkki, 1966~)
이 뚱뚱하고, 못생기고, 조울증을 앓는다는 아저씨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이자, 핀란드 메탈 음악계의 최고 거장이다.
티모 톨키는 열두 살 때 아버지가 자살한 이후, 심히 우울한 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톨키의 출생지인 핀란드의 차가운 감성과 그의 어두운 성장기는 서정적이며 철학적인 음악성을 형성했고, 후대의 많은 뮤지션들은 이러한 톨키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티모 톨키의 음악이 가진 깊이를 흉내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티모 톨키는 흔히 멜로딕 스피드 메탈 밴드인 스트라토바리우스(Stratovarius)의 전(前) 리더, 기타리스트, 메인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스트라토바리우스가 발표한 Episode(1996), Visions(1997), Destiny(1998), Infinite(2000) 등 4장의 음반은 지금까지도 이 장르의 고전이자 마스터피스(걸작)로 일컬어진다.
심지어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메탈 음악이 별로 인기가 없는 우리나라에서까지 유명세를 떨쳤다. 1996년 당시 국내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던 ‘첫사랑’에 Episode의 수록곡인 ‘Forever’가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톨키가 자살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작곡했다는 발라드, Forever는 드라마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많은 드라마 시청자들이 스트라토바리우스를 발라드 그룹으로 착각하고 Episode 음반을 구매했다가 메탈 음악에 놀라 환불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성공과는 별개로,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톨키의 내면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2004년 공식적으로 조울증을 진단받은 그는 신경성 파탄 증세를 자주 보였고, 급기야 2008년에는 독단적으로(다른 멤버들과 상의도 없이) 스트라토바리우스를 해체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다른 멤버들은 이에 반발했고, 분쟁 끝에 결국 티모 톨키는 스트라토바리우스라는 이름과 자신이 밴드에서 작곡한 모든 곡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극단적인 선언을 하고야 만다.
2. Timo Tolkki’s Avalon
스트라토바리우스라는 이름을 쓸 권리를 얻은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은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영입해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혼자 스트라토바리우스를 탈퇴한 셈이 된 티모 톨키는... 오랫동안 방황했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티모 톨키는 솔로 앨범을 내기도 했으며, 레볼루션 르네상스(Revolution Renaissance)나 심포니아(Symfonia)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매너리즘에 빠진 멜로디와 곡 구성을 들려준 그저 그런 음악적 결과물을 내는 데 그쳤다. 이는 톨키 없는 스트라토바리우스가 새로운 변신에 성공하면서 계속해서 호평받고 있던 것과는 대조되었기에, 이 시기의 톨키는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그가 은퇴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던 그는 2013년 아발론(Timo Tolkki’s Avalon)이라는 프로젝트를 결성한다.
에피카(Epica)의 시모네 시몬스(Simone Simmons), 아마란스(Amaranthe)의 엘리제 라이드(Elize Ryd), 심포니 엑스(Symphony X)의 러셀 알렌(Russel Allen), 소나타 아티카(Sonata Arctica)의 토니 카코(Tony Kako) 등 내로라하는 명 보컬들을 초빙해 메탈 오페라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 물론 작곡과 기타 연주는 티모 톨키가 전담한다.
2013년 1집인 The Land Of New Hope, 2014년 2집인 Angels Of The Apocalypse를 발표했고... 망했다. 화려한 게스트들이 무색하게, 티모 톨키라는 이름이 민망할 정도로 질이 떨어지는 음악으로 혹평받았다. 나도 이때쯤 그에 대한 관심을 거의 끊고 있었다.
3. Return To Eden(2019)
그렇게 나는 티모 톨키라는 이름을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전(前) 리더로만 기억하려 했다. 불우한 성장기를 거름 삼아 메탈 음악계 최고 거장 중 한 명이 되었던 내 영웅은 이제 과거에만 있는 것인가? 과거 그의 차갑고 서정적이며, 깊고 우울한 음악은 내 외로움과 내적 혼란을 이겨내는 힘을 주었는데, 톨키는 이제 뮤지션으로서 끝인 것일까?
난 영웅을 잃었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몇 달 전이었던가... 뒤늦게 티모 톨키의 아발론이 2019년에 3집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 2집과는 달리 상당히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도. 난 큰 기대 없이 유튜브에서 아발론의 3집, Return To Eden의 수록곡 Hear My Call을 검색해 들어보았다.
그리고 내 영웅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Return To Eden은 스트라토바리우스 때부터 이어져 온 티모 톨키의 고유한 스타일, ‘차갑고 깊은 서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서정성과 속주 메탈 기타의 조화가 스트라토바리우스의 트레이드마크이자 매너리즘이었고, 톨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톨키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예전 스타일에 머무느냐, 거기서 탈피하느냐를 가지고 오랫동안 갈등해왔다. 그리고 Return To Eden 전까지 그 결과는 이도 저도 아닌 졸작들뿐이었다.
본작, Return To Eden에 와서야 톨키는 비로소 자신의 갈등에 대한 답을 찾은 듯하다. 본작에서 톨키는 차갑고 깊은 서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기타 속주에 집착하지 않고, 비교적 현대에 나온 메탈 음악들의 요소들을 받아들여 보다 유연한 구성을 들려준다.
그리고 사실 그의 최고 장기였던 ‘서정적인 선율미’도 이전 스트라토바리우스 시절과 살짝 다르다. 지금은 보다 더 관조적이고 여유 있는 느낌이랄까?
티모 톨키는 아버지의 자살을 겪으며 성장해왔고, 그것을 거름 삼아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스트라토바리우스 이후 오랜 기간 실패를 겪었고, 이젠 그것을 거름 삼아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낸 듯하다.
그는 마침내 스트라토바리우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티모 톨키는 뮤지션으로서 재탄생했고, 예나 지금이나 그 깊고 철학적인 서정성은 내 외로움과 내적 혼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실패와 슬픔을 이겨낸 그는 내 영웅이다.
티모 톨키가 스트라토바리우스의 나머지 멤버들과 화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게 다른 대륙에 사는 톨키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까지는 없지만, 그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톨키는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이다.
얼마 전, 올해 발표된 아발론의 4집, The Enigma Birth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이 이번에는 어떻게 내게 감동을 줄지 기대하면서.
아발론은 스트라토바리우스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 냉정히 말해 톨키의 연주력은 예전만 못하고, 메탈 음악의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그러나 티모 톨키는 여전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난 그 길의 끝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