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뉴웨이브 2025 | 김희수아트센터
어떤 목소리는 그 자체로 시간의 결을 품고 있다. 10월 23일 김희수아트센터에서 만난 ‘수림뉴웨이브 2025’의 두 번째 무대, 이나래의 《여정》은 전통의 언어로 오늘을 말하는 밤이었다. 전통을 바탕으로 삶과 시대의 질문을 노래해 온 소리꾼 이나래는 이번 무대를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의 흔적을, 그리고 앞으로의 길을 향한 다짐을 들려주었다.
오프닝 <집>은 수림뉴웨이브 오리지널 창작곡으로, 한 집의 각기 다른 방을 하나씩 탐험하듯 공간과 내면을 확장하며 차분히 공연의 문을 열었다. 이어진 <흥보가 中 흥보 박 타는 대목>에서 이나래는 눈빛과 어깨, 부채와 손끝으로 장단을 빚어내며 무대를 장악했다. 역할이 바뀔 때마다 시선의 결과 몸의 선이 변화하고, 그 변주가 그대로 음악이 되었다. 판소리의 매력을 ‘직접적인 신체 체험’이라 소개한 그녀의 말이 정확히 체현된 순간이었다.
<물에 들라>는 새로운 세계로 뛰어드는 이나래의 결심이 엿보이는 곡으로, 북장단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가며 전통 문장을 오늘의 질감으로 변주한다. 이어진 <생각이 많아 생각을 한다>에서는 반복과 중첩의 구문이 리듬이 되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사념의 소용돌이를 소리로 구현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라는 구절이 빠른 호흡과 말하듯 툭툭 던지는 창법을 만나 힙합적 비트감까지 환기한다. 전통의 ‘말맛’과 현대의 언어 리듬이 맞물리며, 관객은 의미를 따라가면서도 리듬에 먼저 이끌리는 이중의 체험을 하게 된다.
<기억의 미로>와 <할머니의 빈무덤>은 시간을 교차하며 삶의 기억과 죽음의 감정선을 촘촘히 엮었다. 후반부 <GREEN>은 얼어붙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생명력의 이미지로 현장을 환히 밝혔다. 땅속의 몸이 빛으로 향해 솟구치는 모습은 삶의 회복과 성장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떨떠리고 나는 간다>에서 이나래는 다시 길 위로 향한다. 버스 창밖의 공허와 텅 빈 마음의 소란 사이, 공연의 첫머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그녀는 떨떠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길의 여명을 본 것처럼.
공연 후 이어진 대화에서 그녀는 “전통과 창작의 균형에 대해 고민하며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판소리의 호흡, 말의 리듬,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오늘의 소리로 번역하는 일, 그녀에게 음악은 대화이고, 그래서 그녀의 창법은 때로 랩처럼 말하듯 흘러간다. 이는 이나래의 솔로 정규 앨범 《지금 어디》(Nowhere, 2024)에서의 결이다. 앨범에서의 죽음과 삶, 침잠과 부상, 물 아래에서 육지로의 반전 같은 서사적 흐름이 이날 무대의 감정선과 깊은 공명을 이뤘다.
올해 수림뉴웨이브의 주제어는 ‘결’이다. 이나래의 소리는 그 결이 단단한 선으로만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표면의 무늬 아래 켜켜이 쌓인 시간과 경험, 그리고 지금 여기의 호흡이 맞물려 새로운 무늬가 만들어진다. 전통을 고정된 형상이 아닌 살아 있는 언어로 다루는 순간, 판소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감각이 된다. 그녀가 걸어갈 다음 여정에서 또 어떤 결이 드러날지, 풍요로운 열매를 조용히 기다리게 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