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 이후의 삶

알고리듬을 지나 장단으로

by 유현욱

우리는 무엇을 욕망했던 것일까


바이오해킹이라는 말 아래에 모여 있던 많은 실천들을 지금 다시 불러 보면, 그 시절 쉽게 꺼내지 않았던 욕망의 지층이 있다. 돌아보면 그것을 지금은 조금 솔직하게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은 몸을 원했다. 이것은 가장 표면의 말이다. 더 맑은 집중력, 더 좋은 수면, 덜 피곤한 하루. 여기까지는 원한다 말함이, 남에게 권함이, 어렵지 않다.


이 표면 아래, 물론이나 통제감이 있었던 것 같다. 몸을 내가 다루는 대상으로 세우고, 변수들을 내 손 안에 쥐고, 결과를 내 책임으로 돌려놓는 일. 자유 앞에서 필연적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실존의 불안 앞에서, 그 불안의 자리를 점검표 위에 옮겨 적는 일.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습관들은 힘겹게나마 불안을 멈춰세웠다.


그 아래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주어진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물려받은 체질, 나이 들어감, 피로의 주기. 이것들을 그저 받아들이는 대신, 무언가 할 수 있기를 원했다. 수동의 자리에서 능동의 자리로 옮겨 앉는 일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가장 아래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쇠해지는 것, 아프게 되는 것, 끝내 사라지는 것. 이 오래된 공포를 현대의 언어는 여러 이름으로 우회해 왔다. 수명 연장, 건강 최적화, 노화 지연, 삶의 질. 그러나 이름을 벗기면 같은 자리다. 인간이 오래 품어 온 유한성의 공포가 지금의 감각에 맞게 번역되어 실천 가능한 프로토콜로 내려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 공포는 다른 욕망들을 아래에서 받치고 있었다. 더 나은 몸을 원하는 것도, 통제감을 원하는 것도,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도 — 결국은 쉽게 지고 싶지 않다는 바탕 위에서 움직였다.


이 네 층의 욕망을 바깥의 언어는 여러 이름으로 불러 왔다. 이성 중심 문명의 반작용으로 몸이 복권되는 흐름, 자기를 경영 가능한 단위로 해방시키는 자유주의의 일상 형태, 기술과 데이터로 종적 조건 너머를 상상하는 운동. 사유사는 이 세 결을 각각 탈근대, 신자유주의적 자기 경영, 포스트휴머니즘이라 불러 왔다. 다르게 들리지만, 몸의 층위에서 보면 같은 한 운동의 세 국면에 가깝다. 그 한 운동의 중심 동사는 하나다. 떠난다. 주어진 주체로부터, 주어진 귀속으로부터, 주어진 종으로부터 —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자리로부터 몸을 빼내려는 움직임. 유한성의 공포가 이 떠남의 밑바닥에 조용히 깔려 있었다.


지난 5년 사이 바이오해킹의 조건이 한 번 더 근원적으로 달라졌다. 2019년만 해도 관련 정보는 여러 팟캐스트와 블로그 사이에 떠다니는 구름 같았고, 추리고 대조하는 데만 긴 시간이 들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거대언어모델이 하루의 점검표를 뽑아 주고, 수면 데이터는 반지 하나에 자동으로 쌓이며, 실천의 진입 장벽은 거의 사라졌다. 7년 전 이곳에 적혔던 세세한 지침들은 이미 낡았다 — 지금은 그 지침을 훨씬 정교하게 받아 볼 수 있다.


바로 이 조건 위에서 당연할 물음 하나가 있겠다.
그걸 다 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가.

실천의 장벽이 낮아질수록, 실천의 끝자리를 묻는 목소리가 작지 않게 들려온다.



실험의 매듭


어떤 앎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에게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서양의 몇몇 전통과 동아시아의 오래된 전통은 이 물음에 오래전부터 하나의 공통된 통찰을 내놓아 왔다. 앎의 추구가 충분히 오래, 충분히 깊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 많이 아는 일이 본질이 아니게 된다는 통찰이다. 축적하던 앎은 꿰뚫는 앎으로, 붙드는 앎은 놓을 줄 아는 앎으로 변한다. 양적 증가가 아니라 양식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전통은 이 전환을 깨달음이라 불렀고, 또 다른 전통은 다른 이름을 붙였지만, 그 운동의 방향만큼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렇다면 같은 구조를 오늘의 조건 위에서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자기 몸과 시간, 주의력과 생활을 대상으로 끝까지 실험해 본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물음으로.


처음에 최적화는 대개 삶의 변수들을 조정하는 일로 시작된다. 수면과 식사, 훈련과 회복, 집중과 분산의 조건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몸의 반응을 읽고, 작은 차이를 축적해 가는 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조정이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어느 시점부터 중요한 것은 더 많은 변수를 더 정교하게 다루는 능력이 아니게 된다. 조정의 기술이 몸에 스며들기 시작하고, 점검의 형식이 생활의 리듬으로 옮겨 가기 때문이다.


그때 변하는 것은 단지 성과나 효율이 아니다. 처음에는 삶을 다루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 점차 그 삶을 다루는 사람 자체를 다시 빚기 시작한다. 최적화는 더 이상 밖에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습관, 판단과 리듬 속으로 스며든 하나의 형식이 된다. 점검표가 사라지는 것은 점검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점검이 이미 몸의 자동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변수는 뒤로 물러난다. 그것은 변수를 잊어서가 아니라, 변수와 생활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최적화는 더 이상 수단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그것은 한동안 스스로를 밀어 올리기 위해 붙들어야 했던 사다리였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올라선 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사다리가 된다. 앎의 추구가 어느 순간 자기 초과의 국면으로 넘어가듯, 최적화의 추구 역시 자기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지난 시간 동안 이 실험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들이 정말 있다면, 그래서 도구가 몸이 된 자리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 다음 무엇을 하게 되는가.


이 질문은 과장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다듬는 일에 머물 수 없다. 도구는 이미 내면화되었고, 방법은 이미 생활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탈진하여 물러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뿐이다. 이제 그 몸으로, 다른 차원의 일을 시작하는 것.



추구하던 것을 얻었다면


이 사고실험은 추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실제의 감각으로 내려오는 순간도 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더 이상 규율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는 실험의 대상이었던 변수들이 하나둘 배경으로 물러난다. 의식적으로 붙들고 있던 것들은 생활의 바닥으로 가라앉고, 점검표가 있던 자리에는 주기성의 고요함만이 남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관리하고 있다는 감각 자체가 희미해진다. 몸이 먼저 알고, 생활이 먼저 반응하고, 의식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실험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실험처럼 느껴지지 않고, 실천은 계속되지만 더 이상 의지의 표정으로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삶에 실제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때때로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더 조정할 것이 많지 않고, 새로 덧붙일 변수도 이전만큼 절실하지 않은 상태. 한동안 추구해 온 것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얻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태. 조화롭고 충만한 날들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서 모든 것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몸의 변수들을 오래 조율한 끝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애초에 개인 내부의 관리만으로는 완결되지 않는 구조라는 사실이다.

수면과 빛, 영양과 운동, 각성과 회복의 리듬을 오래 다듬어 온 사람은 분명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몸은 한층 정돈되고, 감각은 예민해지며, 생활은 이전보다 훨씬 덜 소모적인 방식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오히려 더 분명해지는 층위가 있다. 어떤 종류의 건강은 여전히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 앞에서 굳어 있던 어깨가 풀리는 느낌, 함께 웃는 자리에서 호흡이 저절로 깊어지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의 긴장이 천천히 내려가는 경험. 이런 것들은 단순한 기분의 변화로 축소되기 어렵다. 그것은 정서의 위안이기 이전에, 몸 전체의 상태를 다시 조율하는 사건에 가깝다. 어떤 보충제나 프로토콜도 이 차원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외로움은 단지 감정의 결핍이 아니라 몸 전체에 번져드는 하나의 기후처럼 작동하고, 반대로 연결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부가물이라기보다 인간을 오래 지속시키고 다시 움직이게 하는 바탕에 더 가깝다.


돌아보면 이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홀로 최적화되도록 설계된 존재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리듬을 맞추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몸과 정서를 조율해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적 실천이 충분히 성숙한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것의 무의미함이 아니라 그것의 경계일 것이다. 개인은 자기 몸을 상당한 수준까지 정돈할 수 있지만, 삶 전체를 성립시키는 조건은 끝내 그보다 넓다.


그러므로 최적화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물음은 의외로 오래된 것이다. 더 무엇을 보충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더 정교하게 관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리듬 속으로 다시 들어갈 것인가. 개인적 실천은 여기서 폐기되지 않는다. 다만 그 범위가 확장된다. 몸을 다루는 기술로 시작되었던 것은, 마침내 몸들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형식을 묻는 데까지 나아간다.


아마 바로 이 지점에서, 한동안 낡은 것으로 보였던 말들이 다시 의미를 얻기 시작한다. 공동체, 수행, 의례. 한때는 비합리적이거나 전근대적인 잔여처럼 보였던 것들이,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지속시키는 형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최적화가 몸을 정돈하는 기술이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몸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일 것이다.



공동체·수행·의례의 부활


이 요청은 한 개인의 처지가 아니다. 지금 국면 전체에 겹쳐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몸을 데이터로 번역하는 프로젝트가 충분히 익은 자리에서, 오래 잊혔던 말들이 다시 호명되고 있다. 고대적·전근대적·전통적이라 불리던 가치와 생활체계들. 이것들의 부활이 지금 국면의 한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탈피의 운동 대신, 이미 주어진 몸과 공동체와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운동이 다시 요청되고 있다.


이 요청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테렌스 매케나가 일찍이 고대적인 것의 되살아남을 이야기했다. 동양에서는 김지하가 원시반본을 말했다 — 시원의 자리로 돌아가 거기서 새 근본을 세우는 일. 두 사유가 떨어진 자리에서 비슷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 방향을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전통이 있었다. 동아시아의 오래된 예악(禮樂) 사상이다. 공자 이래 이 전통에서 음악은 여흥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을 조율하고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힘으로 여겨졌다. 미학적 최고가 아니라 문명의 최고 집행 기능에 가까웠다. 가장 오래된 문화 기술로서의 음악. 이 전통은 지금도 조용히 살아 있다.


지금, 빠른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이 차원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거대한 문명 전환의 조짐 앞에서, 한국 지성들 사이에서도 신문명론이 싹트기 시작했다. 고대의 가치에 대한 논의가 담론의 최전선이 되어 있다. 이것이 회귀나 반동의 움직임이 아니다. AI 시대, 최적화의 말미에서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방향이다.


이 방향이 한 사람에게 내려올 때,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일로 변한다. 누군가에게는 수행의 자리를 다시 짓는 일로, 누군가에게는 공동체를 여는 일로, 누군가에게는 의례를 되살리는 일로. 매체는 다르되 방향은 하나다. 탈피의 문법에서 접속의 문법으로. 자기 경영에서 함께 조율하는 자리로. 의식적 실행에서 의례로.



알고리듬에서 장단으로


이러한 흐름 속에 있었던 나의 길을 소개한다. 길의 축은 음악이었다.


나는 음악가다. 오래전 이곳에 글을 적던 시절에도, 그 이후 바이오해킹에 깊이 몰입하던 시기에도, 그 모든 탐구의 첫 번째 과제는 언제나 음악가로서의 성장이었다. 몸과 수면과 주의력을 다루는 일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음악을 더 오래, 더 깊이 할 수 있는 몸을 갖추기 위한 바탕 작업이었다. 당시에는 이것을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의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모든 실천은 음악이라는 하나의 축을 향해 정렬되어 있었다.


한동안의 작업은 알고리듬 작곡이었다. 규칙과 코드로 음악을 설계하고, 파라미터를 열고 닫으며 소리의 가능 공간을 탐색하는 일이다. 이 탐구는 분명 새로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작업이 깊어질수록 같은 간극이 반복해서 드러났다. 몸으로 연주하는 음악과 규칙이 생성하는 음악 사이에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었다. 직접 노래하거나 연주할 수 없는 음악. 우연적 결과로 들리는 소리. 구조는 있으나 살아 있는 시간 감각이 비어 있는 음악. 이런 결과를 마주할수록 물음의 방향이 바뀌어 갔다. 기술을 더 정교하게 다루는 물음에서, 전통 음악은 왜 살아 있게 들리는가 하는 물음으로.


그 물음의 자리에서 한국 장단을 만났다. 장단은 단순하게 음악으로서의 박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공동체가 오랜 시간 몸으로 축적해 온 시간의 구조였다. 전통 음악이 살아 있게 들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몸이 기억하는 리듬, 관계 속에서 익혀진 시간 감각, 반복을 거치며 형성된 밀고 당김의 질서. 기술적 구성만으로는 쉽게 재현되지 않는 층위가 그 안에 있었다.


그때부터 작업의 중심이 옮겨졌다. 한국 장단을 전자음악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 다시 말해 공동체가 몸으로 쌓아 온 시간 구조를 현대 음향의 형식으로 옮겨 오는 일이다. 그러나 이 번역은 책상 위에서 완결되지 않았다. 번역은 단지 소리의 모양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장단이 살아 있던 방식 그대로 몸에 다시 새기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장단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을 살았다. 풍물의 움직임을 걸음으로 받아 보는 시간, 호흡과 박이 언제 같은 결로 맞물리는가를 몸으로 가늠하는 시간. 악보 위에서 풀리지 않던 것들이 발바닥과 어깨에서 먼저 풀리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이 시간들이 일러 주었다. 최적화의 말미에서 다시 열린 자리가 고요하게도 몸으로 돌아오는 수행의 시간이었다는 것은, 돌아보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서 뜻밖의 마주침이 하나 있었다. 풍물과 전수 방식이 유사하나 다른 문명권에서 이어져 온 수행 전통인 이란의 주르카네(Zurkhaneh), 곧 고대로부터 전해진 훈련법의 결을 접하게 된 일이다. 지역도 종교도 다른 두 전통이, 몸을 다루는 문법의 깊은 자리에서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자리에서 따로 풀어 보고 싶다.


지금은 비슷한 물음을 품은 동료들과 함께 작은 스튜디오를 꾸리며 지낸다. 한국 장단의 현대적 번역을 공통의 기반으로 두고, 교육과 연구와 제작이 한 자리에서 순환하는 판을 만드는 일이다. 앞으로의 시간은 이 작업이 점차 라이브의 자리로 나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의례의 결을 품은 모임들, 여러 전통의 리듬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더링, 현장에서 몸과 몸 사이로 소리가 통과하는 자리. 그곳에서 만나게 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이곳에 적어 두었던 글들의 질문에 공감해 주셨던 분들이 있다면, 다시한번 인사를 드린다. 이 편지는 그분들께 드리는, 내 오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앞으로 이곳에 이어 쓰는 글들은 음악과 공동체를 씨실로 삼아 여러 갈래의 앎을 엮어 가게 될 것이다. 주제는 다채롭겠지만, 이들을 음악, 사회, 생리, 섭리의 언어로 엮어가며 유희하는 흔적들을 남겨보려한다.


작가의 이전글싸이키델릭 르네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