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국회도서관, 2025년 7+8월호, 류영호
최근 세계 출판계는 “생성형 AI가 만든 문장 뒤에 누구의 권리가, 어떤 보상이 숨어 있는가?”를 묻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유럽연합(EU)의 AI 법(AI Act)은 2024년 8월 발효됐지만 창작자들은 여전히 거리로 나와 투명성과 보상을 외치고 있다. 생성형 AI의 급속한 발전은 문화 산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으며, 저작권이라는 최소한의 보호막조차 무력화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에서 저작권자와 출판사들은 테크 기업을 향해 “멈춰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지금 출판계는 창작과 기술의 경계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주요 국가별 창작과 AI 이슈 대응 현황
프랑스에서는 지난 3월에 국립 출판협회, 문인협회 등이 메타(Meta)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메타가 자사의 AI 모델을 훈련하기 위해 수많은 프랑스 도서를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국립 작가와 작곡가 협회 프랑수아 페이로니 회장은 “프랑스에서는 이례적일 수 있는 이번 소송 제기의 목적은 저작물과 문화유산을 약탈하여 AI를 훈련하고, 작가들의 진짜 책과 경쟁하는 가짜 책의 위험으로부터 작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소송은 AI 훈련 데이터에서 저작권 침해 여부를 본격적으로 법정에서 따지는 프랑스 최초의 사례였다.
영국에서는 데이터 법안(Data Bill) 개정을 둘러싼 정치적 실패가 출판계를 실망하게 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감독으로도 유명한 비번 키드론이 주도한 개정안은 AI 기업이 데이터 훈련에 어떤 저작물을 사용했는지 창작자에게 통보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보수당이 장악한 하원에서 부결되었고, 결국 정부는 법안이 통과된 후 6개월 뒤에 ‘경제 영향 보고서’를 발표하겠다는 모호한 견해만 내놓았다. 이에 대해 영국출판협회(Publishers Association)는 “지금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응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보호 조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AI 기업들은 계속해서 ‘묻지 마!’ 훈련을 진행할 것이며, 저작권은 계속 뒷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대응은 법적 완화와 정책 실험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일본은 저작권법 제30조를 통해 ‘텍스트 및 데이터 마이닝’을 연구 및 비상업적 목적하에서는 허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AI 스타트업 생태계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싱가포르 또한 유사한 법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창작자에게 일정한 ‘라이선스 장려금’을 지급하는 병행 정책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5월 브뤼셀에서는 유럽 창작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모여 AI 법(AI Act)의 실질적 이행을 촉구하는 회의가 열렸다. ‘정직하게 행동하고, 문화와 함께 행동하라(Act with integrity, act with culture)’는 주제로 열린 이 자리에는 유럽 도서 시장의 중심을 이루는 플라네타 그룹(Planeta Group)과 액테스 수드(Actes-Sud) 등 유력 출판사 대표들이 대거 참석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든 학습 데이터·파라미터(특정 값이 미리 입력되어 있게 만드는 기능)·재학습 로그를 공개하라”는 강경한 안을 촉구했다. 이는 AI 법이 명시한 저작권 존중 원칙을 문장 단위까지 추적할 수 있도록 실행하라는 의미다.
AI 테크 기업과 출판계의 대응
하지만, 다수의 테크 기업은 영업비밀 침해를 이유로 부분 공개만 수용하겠다는 태도다. 정책과 산업이 엇갈리는 사이에 생성 AI는 이미 수천억 단어 규모의 말뭉치를 토대로 10억 명 이상의 이용자 앞에 새로운 글을 뿜어내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AI 기업들이 작가의 동의나 보상 없이 저작물을 훈련에 사용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의 법적 틀조차 이러한 현실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완전한 투명성과 보상의 원칙은 창작 생태계 보호를 위한 절대 조건이라는 발언이 반복되었고, 이는 단순한 법률 논쟁이 아닌 유럽 민주주의와 문화적 자존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AI가 인간의 창작을 ‘보조’하는 것을 넘어서 ‘대체’하고 있는 현실은 출판계에 더 이상 가상의 위협이 아니다. 미국 작가 길드(The Authors Guild)는 수천 명의 작가와 함께 대규모 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에 대한 집단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오픈 AI와 같은 기업들이 수많은 작가의 동의 없이 책의 불법 복제본을 학습에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명백한 저작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놀라운 것은 작가들 사이에 이 정도로 의견이 일치한 전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 작가 길드의 대표인 메리 라젠버거는 “이 문제만큼은 모든 회원이 단합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출판사들도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 작가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학 에이전시들은 LLM에 작가의 저작물을 사용할 경우, 사전 동의를 명시한 조항을 계약서에 넣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일정한 라이선스 비용을 받고 사용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동시에 AI는 작가의 창작 도구로도 활용된다. 아이디어 발상, 텍스트 편집, 자료 조사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보조적 위치에서 새로운 형태의 창작 실험을 허용하고 있다. 와일리(Wiley) 출판사에서는 작가들이 AI를 책임감 있게 활용하기 위한 지침을 발표했다. AI는 글쓰기의 대체물이 아니라 보조 도구라는 점을 강조하며, 저자들이 AI를 사용할 때 반드시 공개하고, 중요한 주장이나 결론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면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지침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작가들이 AI 시대에 어떤 윤리와 전략을 가져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하나의 문화적 지침이다.
더 나아가 스프링거 네이처(Springer Nature)는 최근 AI 생성 콘텐츠의 진위 판별을 위한 자동 검출 도구를 개발하고 있으며, 학술지 투고 단계에서 허위 인용과 ‘가짜 논문’을 걸러내기 위한 프로토콜을 수립하고 있다. 교육 출판사들도 문제지를 AI로 작성할 경우, 학습 효과와 콘텐츠 품질 유지의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두고 정책 수립에 착수하고 있다. 이는 ‘기계가 만든 콘텐츠’의 정체성과 진위 판단이 점차 학문적, 산업적 영역 전반에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화를 지키는 일은 속도보다 깊이
기술은 늘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하지만 문화를 지키는 일은 속도보다 깊이가 필요하다. AI가 인간의 창작을 확장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지는 바로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출판 산업은 거대한 기술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다. 작가와 출판사가 함께 목소리를 내고, 여러 국가와 유럽연합이 AI 법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AI는 도구일 수 있다. 그 도구가 창작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문화를 소비하는 데 쓰인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의 길이 될 수 있다. 기술은 사람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그 사람 중에는 오늘도 글을 쓰며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 궁극적으로 AI는 인간의 창작을 대신할 것이 아니라 확장해야 한다. 다만 그 확장이 창작자의 권리를 배제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된다. 출판사, 작가, 정책 입안자, 기업이 공존하는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빠르게 찾고 실행해야 할 시점이다.
* 참고자료:
UK Publishers on AI’s Threats: ‘A Marathon, Not a Sprint’, Publishing Perspectives, 202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