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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북스 90년, 공공을 위한 출판의 실험

월간 국회도서관 <출판가 길라잡이>, 25년 9월호.

by 류영호

1935년 앨런 레인(Allen Lane)은 영국 런던에서 엑서터로 돌아오던 철도역에서 읽을 만한 문학 서적을 찾지 못한 경험을 계기로 형제들과 펭귄북스(Penguin Books)를 공동 창립했다.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양질의 문학’이라는 출판사의 비전은 당시 출판업계의 고정관념을 깨는 도전이었다. 그는 고전, 문학, 사회과학 등 교양 도서를 당시 ‘담배 한 갑’ 수준의 저렴한 가격(6펜스)에 문고판 페이퍼백(paperback) 형식으로 출간하고, 서점 체인과 철도역 키오스크에서 유통했다. 펭귄북스의 첫 페이퍼백이 출간된 지 1년 만에 300만 부가 독자의 손에 들어갔다. ‘저렴하지만 품격 있는 책’이라는 전략은 단순한 가격 전략을 넘어, 책을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 문화로 전환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펭귄북스의 성공 요인은 가격 경쟁력만이 아니라, 출판 디자인의 혁신에도 있었다. 초창기 커버 디자인은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이 고안한 3색 코딩 체계를 따랐다. 오렌지(소설), 파랑(논픽션), 초록(추리소설) 등 장르별 색상 체계는 가독성과 인지도를 높였고, 통일된 서체와 절제된 표지 구성, 펭귄 로고는 브랜드 이미지로서 전 세계 문학 독자에게 각인되었다. 이는 현대 출판 마케팅에서 ‘디자인은 곧 메시지’라는 인식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오늘날 서체와 표지 디자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출판사의 기원이 되었다.


preview.jpeg https://www.latrobe.edu.au/news/articles/2018/opinion/the-penguin-paperback


지식의 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실천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펭귄북스는 병사들을 위한 책 보급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병영 도서관과 야전용 문고 시리즈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전장의 독자들에게 민주주의와 시민 교양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다. 출판이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지적 무장과 심리적 안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전후에 펭귄북스는 ‘펭귄 클래식(Penguin Classics)’ 시리즈를 론칭하여 세계 문학의 정본을 대중에게 소개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셰익스피어,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엄밀한 학술 번역과 해제를 제공하면서도 가격과 포맷은 대중적이었다. 이는 학계와 대중을 연결하는 출판 모델로서 일본의 ‘이와나미문고’, 한국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등 대형 시리즈 기획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0년 펭귄북스는 영국 출판사로는 최초로 D.H. 로런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무삭제판을 출간한다. 이는 당시의 검열 법인 ‘음란 출판금지법(Obscene Publications Act)’에 도전하는 사건이었고, 곧바로 형사 소송으로 이어졌다. 재판은 문학자, 언론인, 교육자들이 증인으로 참여하는 사회적 논쟁의 장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펭귄북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는 영국 출판 역사에서 표현의 자유를 재정립한 전환점이 되었다.


1940년대부터 시작된 ‘펠리컨 북스(Pelican Books)’ 시리즈는 사회과학과 교양 교육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C. 라이트 밀스, 에릭 홉스봄 등 당대 지식인의 저작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소개하며, 대학 교양 교재의 대체재가 되었다. 펠리컨 북스는 학문과 시장, 교육과 실천의 접점을 구성한 출판 모델로 오늘날 오픈 액세스(Open Access) 담론의 전신으로도 평가된다.


1985년 펭귄북스는 영국의 대형 출판사 피어슨(Pearson)에 인수되었고, 2013년에 랜덤하우스(Random House)와 합병하여 펭귄랜덤하우스(Penguin Random House)로 재편된다. 합병 당시 독일의 미디어 그룹 베텔스만(Bertelsmann)과 피어슨이 각각 일부 지분을 가졌으나, 2020년 피어슨이 지분을 모두 매각하며 베텔스만이 100% 소유하게 되었다.


penguin-waterstones-1-scaled.jpg https://www.penguin.co.uk/discover/campaigns/penguin-at-waterstones-piccadilly


세계 최대의 무역출판 그룹의 임프린트(imprint) 시스템을 통해, 펭귄북스는 글로벌 유통망과 데이터 기반 마케팅을 강화하며 상업화된 출판 체계를 정착시켰다. 반면, 일부 비평가들은 독립 편집권의 약화와 비판적 콘텐츠의 축소를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펭귄북스는 여전히 고전 출판, 사회적 기획, 교양 콘텐츠 등에서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공공성을 모색하며 미래를 준비하다


2020년대의 펭귄북스는 디지털 기술, 인공지능(AI), 지속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변수 속에서 출판의 본질을 재정의하려는 시도에 나선다. 펭귄랜덤하우스는 2030년까지 탄소중립(Net Zero)을 목표로 선언하고, 인쇄 공정과 공급망에 FSC 인증 종이 사용, 디지털 교정 시스템 도입 등 친환경 전략을 도입 중이다. 동시에, 생성형 AI의 확산에 대응하여 일부 콘텐츠에 ‘AI 학습 금지’ 조항을 명시하며, 기술과 저작권의 경계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펭귄북스는 전자책, 오디오북, 인터랙티브 콘텐츠 등 새로운 독서 방식에 대한 펭귄의 실험도 활발하다. 특히 ‘펭귄 클래식 오디오 시리즈’는 청각적 문해력을 강화하고,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주목받는다. 이는 단지 포맷의 변화가 아니라, ‘읽기’의 개념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문화적 전략이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펭귄북스는 특정 국가나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출판 모델로 자리 잡았다. 문고판 출판의 세계화, 브랜드 중심 편집 전략, 사회적 출판 기획, 표현의 자유 수호 등은 오늘날까지 세계 출판계의 전범이 되고 있다.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도 유사한 실험이 이어졌으며, 유엔이 주도하는 SDG 퍼블리셔스 콤팩트(SDG Publishers Compact)와 같은 국제 협약에서도 지속가능한 출판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Untitled_design_74.jpg https://www.thebookseller.com/news/penguin-classics-to-launch-penguin-archive-series-with-publicatio


올해 창립 90년을 맞이한 펭귄북스의 역사는 단지 출판 브랜드의 생존이 아닌, 책과 출판이 무엇을 위한 사회적 행위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시간이었다. 페이퍼백의 대중화, 디자인 전략의 선도, 지식의 민주화, 표현의 자유 수호, 독서 접근성 확대, 디지털 전환과 지속가능성에 이르기까지, 펭귄북스는 출판의 경계를 확장하며 정의 자체를 재구성해 왔다.


그들은 늘 ‘출판은 공공적 실천이어야 한다’라는 전제를 놓치지 않았다. 창립자 앨런 레인의 철학은 단순한 유통의 혁신이 아니라, 책이라는 매체가 공공재로 기능해야 한다는 일관된 지향이었다. 이는 오늘날 디지털 기술, 인공지능, 기후 위기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펭귄북스는 기술적 진보와 상업적 압력, 독립성과 윤리 사이에서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세계 최대의 출판 그룹 펭귄랜덤하우스 안에서 ‘품격 있는 대중성’이라는 창립 정신을 지켜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펭귄북스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출판이 단지 책을 파는 산업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그들의 100주년도 출판의 미래에 중요한 좌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참고자료]

- From Lady Chatterley’s Lover to The Salt Path, 90 years of Penguin books, The Times,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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