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람들은 답답한 상황을 보고 'Naipit'(나-이핏)이라고 표현한다. 사전적인 의미는 '끼다', 샌드위치 속 햄처럼 양쪽 사이에 무언가 끼어 있을 때 쓰는 단어다. 관용적 의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두 상황 사이에 끼어있는 상태다.
Naipit(나이핏)라는 단어는 내 현재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나를 붙잡고 있는 상황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꿈 앞에서 한 발짝 다가갈수록 내 두 팔을 붙잡은 상황들이 나를 뒤로 끌어당긴다. 이렇게 나를 뒤로 끌어당기는 상황은 바로 내 외국인의 삶과 필리핀의 삶이다. 그리고 내가 잡으려고 안간힘 쓰고 있는 꿈은 평생 글을 쓰는 삶이다.
필리핀 그리고 안정적인 성공
2살 아기였던 나는 고향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기도 전에 한국에 체류하게 되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는 나를 보고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보았다. 외국에서 자랄 기회가 생겼으니 반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필리핀은 관광하기 좋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관광 분야를 제외하고 사회와 경제를 언급하면 개발도상국, 후진국이라는 씁쓸한 단어를 듣게 된다. 내 고향이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에 현지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은 외국에서 성장하게 될 나를 '반 정도 성공한 아이'라고 불렀다. 나는 중학교까지는 이들이 말한 성공이 무엇인지 몰랐다. 꿈을 얻기 전까지 말이다.
'전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작가 되면 돈을 벌기 힘들 텐데.'
'그래도 하고 싶습니다.'
'힘들 거야, 다른 직업 선택하는 거 어때?'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늘 하던 말이었다. 대부분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어려운 직업이고 돈벌이로 삼기 힘들다. 맞는 말이다. 안정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성공하기 힘든 직업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현실적인 조언을 계속했다.
조언해주는 사람들이 내 꿈을 짓밟았다. 그래서 나쁘다. 이런 말을 쓰기 위해 이들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물론 중학교 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조금 하긴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건 어려운 꿈이야'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했다.
'왜 어려운 일인 거죠?'
'직업으로 삼기엔 어렵지. 네가 작가로 활동하면 과연 한국에 남을 수 있을까?'
내가 만난 필리핀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필리핀 현지에 성공하기 어려워서 외국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낫다. 필리핀에서의 성공이란, 나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챙기고 힘든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난 이미 외국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성공의 반을 잡은 셈이다. 외국에서 돈을 벌고 싶은 필리핀 사람들이 많은데 이미 외국에 있는 나는 안정적인 직업과 거리가 먼 꿈을 선택했다. 그들의 눈에는 나는 안정적인 성공을 포기하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되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 그리고 비자
필리핀 사람들이 내게 안정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직업을 권유했다. 그들이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 해외와 관련된 일을 했다면 비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것이다. 비자는 합법적으로 외국에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자 신분증이다. 외국인등록증이라고도 한다.
비자의 종류는 다양하다. 구직, 예술흥행, 연구원, 외교관, 유학생 등 20개 이상으로 구성된다. 미성년자인 상태로 한국에 이민 왔기 때문에 동반 비자를 받고 살았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졸업까지 연수 비자로 살았다. 대학교 들어갔을 때 유학생 비자를 받고 한국에서 체류했다. 이렇게 하나의 바자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닌 체류 목적에 따라 비자를 변경할 때가 있다.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외국인을 본 적 없고 작가를 위한 비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꿈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다행히 비자 업무 대행 사무소에 문의한 결과, 작가 활동이 예술흥행 비자에 포함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희망은 있다. 문제는 취업이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전 작가가 될 사람이라서 글을 열심히 써서 책을 완성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용이 핵심이다. 작가로 고용되어야 안정적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예술흥행 비자뿐만 아니라 다른 취업 비자도 마찬가지다.
비자를 받고 한국에서 체류하는 것이 힘들다. 이건 필리핀 사람들의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실제로 예술흥행 비자받고 한국에 체류했던 뮤지션 부부의 서류 절차를 들었는데 과정이 까다롭고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에 살다가 모든 것을 놓고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비자받기 어렵고 한국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이 내 꿈을 듣고 걱정한 것이다.
끝내 안정적인 성공부터 잡은 외국인
내가 꿈을 위해 시련을 극복했던 주인공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주인공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안정적인 성공에 집중했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나를 어릴 때 보살폈던 필리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작가로 밥벌이하기 힘들다는 사례가 많았다. 현실을 듣고 난 후 내 꿈을 좇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미련이 남아있었는지 작가를 부업으로 삼고 그 부업을 살릴 직업을 찾기 시작했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적인 성공과 부업으로 삼을 꿈을 이루기 위해 작은 성공을 모았다. 공모전 혹은 대회에 나가서 상장을 많이 받았고 어른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을 걷고 명문대에 합격했다. 내가 선택한 학과는 글쓰기와 가까운 한국언어문화교육학과다. 영어보다 한국어에 더 익숙한 상태이기 때문에 나중에 작가로 활동할 때 한국어로 활동하기로 했다.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공부보다 공모전에 집중했다. 문학 관련 수상실적을 쌓아야 나중에 외국인 작가로 활동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다양한 문학 공모전에 참여했다. 이러한 내 끈기와 노력 덕분에 스토리텔링 상장과 상금을 받았고 수상작은 5개 국어로 번역된 동화책으로 나왔다. 난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중에 웹툰 공모전 중 스토리 부문에 참여해서 금상을 받았다.
작가를 부업으로 삼고 다른 직업을 찾으려고 했는데 공모전에서 이룬 성과를 보고 안정적인 성공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공모전만 보고 인생을 결정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난 듣지 않았다. 입상의 영광이 계속될 줄 알고 다양한 공모전을 도전했는데 웹툰 공모전 이후로 연속적으로 떨어졌다. 패배의 맛을 본 나는 그제야 어른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역시 이 모든 것은 그저 운이었던 걸까.'
나는 다시 안정적인 성공에 집중했다. 공모전을 잊고 다른 학생들처럼 졸업과 취업 준비에 집중했다. 취업을 위해 인턴과 대외활동까지 했다. 안정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공허한 마음이 들고 기쁘지 않았다. 그 마음이 인턴 했을 때 더욱더 커졌다.
나에게 회사 인턴이란, 안정적인 성공의 예고편이다. '내가 만약 회사에 취직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을 대답할 수 있는 활동이다. 필리핀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적인 성공이 과연 내게 맞는 성공일지 알고 싶기도 해서 인턴을 지원했다. 회사에 들어갔을 때 한국 드라마에서 보았던 분위기와 정말 비슷했다. 모두 회사 분위기에 맞는 옷차림을 입고 타자기를 두드리면서 열심히 일했다. 난 그 분위기와 하나가 되어 안정적인 성공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같이 인턴 하는 친구들은 잘 적응하고 있는데 나만 속으로 힘들어했다.
'사람들이 왜 회사에 다니고 싶어 하지? 너무 답답해. 나가고 싶어.'
회사라는 곳은 내 비자를 살릴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회사라는 곳은 안정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곳이다. 스스로 회사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 곳인지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꾸만 답답한 기분이 느꼈다. 나는 한 달 동안 회사에서 인턴을 했는데 그곳에서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 꿈과 관련 없는 곳이 내게 안정적인 삶을 줄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 보고 버틸 수 없다.
회사 사람들은 친절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업무를 주면서 경험을 쌓을 기회를 만들었다. 환경 부분에서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내가 인턴 한 곳이 내 꿈과 관련 없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집에 갈 때마다 속으로 이런 말을 했다.
'안정적인 성공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난 이렇게 힘든데. 안정적인 성공을 위해 나 자신을 버려야 하는 건가? 난 왜 꿈을 이룰 수 없는 거지? 외국인이라서?'
'필리핀이 잘 사는 나라였으면 나는 지금 비자 걱정 없이 꿈을 이룰 수 있을 텐데.'
내 고향은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에 현지에 성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 서 있는 나라에서 성공해야 한다. 내 꿈은 평생 동안 글을 쓰는 것인데 외국에 나가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비자라는 현실적인 장애물 때문에 꿈보다 안정적인 성공을 선택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Naipit(나이핏)한 상황 속에 있어서 화가 났다.
회사 인턴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내가 실수를 저질러서 회사를 나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무사히 업무를 다 하고 인턴을 끝냈다. 내가 말한 실패는 안정적인 성공의 실패다. 인턴 하면서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나 자신을 보고 결심했다. 난 역시 노트북 앞에 서류를 작성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난 노트북 앞에서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다.
결국 꿈을 선택한 외국인
대학을 졸업했을 때 난 졸업장을 받고 속으로 선언했다. 이제부터 사람들을 위해 안정적인 성공을 잡지 않고 나를 위해 꿈을 잡기로 했다. 안정적인 길을 걸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 정신만 피폐해졌다. 그래서 내 꿈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로 했다.
현재 내 목표는 꿈을 이루기 위해 'Naipit'(나-이핏)한 상황을 없애는 것이다. 하나뿐인 내 인생을 후회 없이 보내고 싶어서 꿈을 선택했다. 이제부터 사람들이 해주는 조언을 거절하겠다는 뜻이 아니며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여전히 조언을 받아들일 것이고 여전히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할 마음이 있되 예전처럼 남을 위한 선택을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