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새해 계획을 이룬 2023년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올림픽 마라토너인 세코 도시히코 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중략)..그때 나는 "세코 씨 같은 레벨의 마라토너도 '오늘은 어쩐지 달리고 싶지 않구나. 아, 싫다. 오늘은 그만둬야지. 집에서 이대로 잠이나 자고 싶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해보았다. 세코 씨는 말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야' 라는 어조로 "당연하지 않습니까, 늘 그렇습니다!" 라고 말했다.
사람은 다 비슷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역시 이런 구절을 읽으면 안도감을 느낀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개인적으로 2023년은 내게 큰 의미가 있는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새해 계획을 난생 처음으로 제대로 지키며 내적으로 많은 변화와 성장을 이룬 해였기 때문이다.
나의 올해 새해 계획은 딱 하나였다. 일상 속에 좋은 루틴들을 장착하여 내가 원하는 내 모습에 다가가자는 것이었다. 싫든 좋든 나는 이걸 하기로 마음 먹었고, 내 몸과 뇌가 아무리 저항해도 '안 하고 넘어가는 날이 없도록' 설정하자고 결심했다.
그중에는 한두 달 만에 비교적 수월하게 장착된 루틴도 있고, 6개월 이상 걸린 루틴도 있다. 장착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할 때마다 힘들다고 느끼는 루틴도 있다. 그래서 위의 구절을 읽고 많은 위안이 되었다.
그냥 '새해 계획을 드디어 이루어서 참 뿌듯하네' 라는 마음만 있었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겪은 위기와 실패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갔던 일상의 루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역시 독서와 운동이었다. 한달에 9권씩 책을 읽었고, 11월 현재까지 총 99권의 책을 읽었다. 다음 달이 되면 108권이 되어있을 것이다.
운동은 달리기와 헬스를 병행하고 있다. 헬스를 기본으로 하되, 좀 싫증이 나거나 유독 화창한 날에는 밖에서 러닝을 한다. 이렇게 하니 최소 주 4회는 빠지지 않고 운동을 하게 되었다.
놀라운 점은 여전히 운동하러 가기 싫다는 사실이다. 독서는 힘들게 한 적이 거의 없는데 운동은 여전히 힘들다. 언제나 하기 싫고, 매일 운동하지 않을 핑계를 찾아본다. 하지만 루틴 하나를 빼먹었을 때의 찝찝함이 싫어서 결국엔 몸을 일으킨다.
운동은 나를 좀더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모드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고, 해보지 않은 일에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운동과 독서 습관은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듯, 다른 좋은 루틴들을 불러들였다. 운동을 하다보니 (운동한게 아까워) 몸에 좋지 않은 커피와 술을 안 마시게 된다 -> 외식 비율이 줄어든다 -> 요리 실력이 늘고 생활비가 줄어든다 -> 그동안 엄한 곳(?)에 돈을 많이 썼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계부를 쓰면서 가정 경제를 파악한다 -> 물가에 눈을 뜨다보니 그동안 관심없던 정치와 경제 뉴스가 눈에 들어온다 -> 나 자신이 경제의 문외한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제 공부를 시작한다, 로 발전되었다.
한달에 9권씩 책을 읽다보니 당연히 독서 시간 확보가 중요해졌다. 아무리 틈틈이 독서를 해보아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수없이 실패해왔던 '미라클 모닝'을 시작했다.
독서를 하다보니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 미라클 모닝 덕분에 새벽 독서 습관을 얻는다 -> 피곤해서 일찍 자게 된다 -> 미라클 모닝 습관이 강화된다,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시작해서 11월이 된 현재, 나의 루틴은 총 8개이다. (1.미라클 모닝, 2.운동, 3.독서, 4.본업, 5.본업 관련 공부A, 6.본업 관련 공부B, 7.개인 프로젝트C, 8.경제 공부)
이렇게 늘어놓으니 상당히 많아 보이는데 운동과 본업 항목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10분~1시간 이내로 끝낼 수 있는 일들이다. 아무리 바빠도 최소 10분이라도 하고 넘어가려고 노력한다. 들이는 시간보다 빼먹지 않고 매일 조금(단 5분이라도)이라도 해서 '연속성'을 갖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날 또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잘 지켜오던 나의 루틴들은 가을 무렵에 한번 크게 휘청거렸다.
친정 부모님의 고질적인 문제가 악화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온갖 병치레를 하고 컨디션을 회복시키느라 거의 두 달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것이다.
마치 온 우주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변하는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 어디 얼마나 간절한지 시험해볼까? 너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볼까?'
툭툭 나를 기분 나쁘게 건드리며, 어서 예전의 무기력하고 부정적인 너로 돌아오라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편하고 우울하게 살아가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친정 문제는 사실 나의 트라우마와 같은 부분이었다. 그 오래된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어린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루틴이고 뭐고 나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고, 몸도 많이 아팠다. 독립적인 가정을 꾸린 마흔셋의 내 감정이, 열세 살의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많이 우울했다.
두달 간 아프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걱정을 하든 안 하든 해결되는 건 없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었다면 벌써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건 부모님의 문제일 뿐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뒷수습은 하되 그 과정을 낱낱이 파악하려 들지는 말자, 이제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거리를 두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나는 다시 천천히, 올해 초에 계획했던 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뿐이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그를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킬 순 없다. 나 하나 변화시키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어찌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내가 처한 현실을 드라마틱하게 바꿀 수는 없지만 그 현실을 어떤 시선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같은 상황에서 우울해할지, 연민을 느끼지만 다시 내 일상에 집중할지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벌써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두 달간은 힘들었지만 전반적으로 나의 2023년은 참 행복했다. 처음에는 우주의 테스트 쯤으로 생각했던 일들도, 지나고 보니 앞으로 겪을 더한 시련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라는 '예방주사'로 느껴진다.
모두에게 따뜻하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연말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분노하기보단, 연민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나로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