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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래블 Jan 29. 2020

30.산티아고 순례길 에필로그_스물아홉 인생을 돌아보며

'내가 여기 왜 왔지?!' 젠장, 산티아고 순례기

너무 추운 겨울    


10대,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명문대 입학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나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외에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수능에서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났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세상 사람들에게 창피해하며 자책했다.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찾아온다.    


하지만 봄은 온다.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학교 앞을 걸어다녔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시간이 흐르면 봄이 찾아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 봄은 내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허황된 목표를 향해 앞만 보며 달려가기 보다 지금 딛고 서 있는 이 땅과 그 위에 새겨지는 계절을 찬찬히 즐겨보기 다짐했다.     



내가 선택한 하루    


4월 중순, 아직 바람이 쌀쌀한 저녁. 도시의 야경이 넘실대는 한강에 앉아 차가운 캔맥주를 들이켰다. 이 시간에 열람실이 아닌, 야외에 앉아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다음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뒤 나의 대학 생활은 아무 생각 없이 놀았던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죽어있던 감각과 감정을 되살리는 일을 했던 것 같다.

 


꽃 피는 봄이 오면    


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갔고, 단풍이 지면 연인과 손을 잡고 단풍을 보러 갔다. 안 먹어본 음식은 일부러 먹어봤고, 새로 개봉하는 영화는 물론 지난 영화도 챙겨봤다. 유명하다는 소설을 찾아 읽고, 책을 읽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가면 몇십분씩 학교 주변을 걸어다니며 지나는 계절과 지나는 하루를 지켜보았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마지막 학기는 금새 찾아왔다. 모두가 취업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대학생 때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대학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책을 좋아했던 터라 매일 책을 정리하고, 책을 찾아주고, 이런 책도 있구나 살펴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화려하지 않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4년을 가득 채웠다.    



막막한 취업준비    


마지막 학기까지 마치고 이제는 정말 취업 준비를 해야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토익 점수만 만들면 되는 건지. 명사들은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하는데 책과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것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이런 취향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막막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    


그러던 중 한 IT 기업의 인턴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주된 업무는 사내 교육,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일이었고, 이외에 사내 도서관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바로 이거다! 생각이 들어 지원하였고, 일하게 되었다.    

누구나 아는 이름있는 회사, 화려한 건물 안에서 일하는 것도 멋진 경험이었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 온종일 있는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을 두 발로 직접 누비며 만나고 싶었다.

       


세계를 만나다


그렇게 여행사 마케팅팀에 입사하게 되었다. 여행과 관련된 글을 매일 쓰게 됐다. 그 과정에서 국내 여행지는 물론이고, 다양한 해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시칠리아 해변에 몸을 담궈보기도 하고, 별똥별이 쏟아지는 몽골의 초원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이 소설 '폭풍의 언덕'을 떠올리게 하는 에든버러 언덕을 걸어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세계 19개국을 여행하며 지구라는 공간을 온몸으로 느껴보았다.

터키 욀루데니즈

성서공부


여행도 중요하지만 항상 글을 써야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을 가까이 했다.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독서모임을 통해서 읽은 내용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연히 명동성당에서 진행하는 성서모임을 알게 되었다. 성서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호기심에 성서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성서 속 이야기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고리타분하고 옳은 말만 할 줄 알았던 성서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캐릭터와 그래서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는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가득했다. 그렇게 성서에 빠져들어 창세기, 탈출기, 마르코복음,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신부님의 추천으로 800km에 달하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게 됐다.    



산티아고 순례길    


2000년 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야곱이 걸었던 산티아고길.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따라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었다. 4달 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부부, 휴가 때마다 자신의 집인 독일에서부터 조금씩 걸어 산티아고로 향하고 있는 할머니, 죽은 아들이 매고 다니던 가방을 매고 길을 걷고 있던 아저씨까지. 한달 내내 하루 4~5만보씩 걷는 일이 매우 힘들었지만, 수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이야기와 길, 그리고 그 위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내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의 20대    


나의 20대는 해야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의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것에 100% 나를 다 내던질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을 놓지 않고 계속 이어나갔다.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에 다니는, 고난마저 평범한 그저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이 특별해지는 것은 자신이 더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대학을 못가서, 이름 있는 기업에 들어가지 못해서, 오히려 내 선택지는 더 다양해졌고, 나의 취향이 듬뿍 묻어나는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앞으로


나는 내가 지나온 시간을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책을 읽고, 걸어다니며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것이 좋다. 내가 쓴 글이 언젠가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웃음과 위로, 더 나아가 깊이 있는 울림을 줄 수 있기를 원한다.         



산티아고 순례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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