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 해임당한 나는 왜 '멋진'교수인가?
내 전공은 특수교육이다. 특수교육에는 영재 교육도 포함된다. 하지만 특수교육 전공자들이 영재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무리다. 주로 지적장애인과 자폐성 장애인을 가르친다. 학령기 특수교육 아동의 대략 8할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지적장애인과 자폐성 장애인을 발달장애인이라고도 한다. 나는 특수학교와 특수학급, 조기교육실 등에서 이들을 가르친 후에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내가 가르쳤던 모든 장애 학생은 지적 능력이 열악했다. 사실 나도 그렇다. 전공 측면에서 따진다면 나는 명백한 수학 학습장애인이다. 구구단도 5단이 넘어가면 자연스럽지 않다. 숫자를 셀 때도 일흔이 넘어가면 속으로 긴장한다.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학은 단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찍어서 4개를 맞추었다.
그래도 지적장애 학생을 가르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과는 대부분 즐거웠다. 대화도 잘되었다. 나와 함께 한 지적장애 학생들은 대부분 한 가지 면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었고, 밝아졌다.
학생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은 내 교육 방법의 핵심이었다. 잠시 경계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누군가 방해하지 않고 나와 그 학생을 그대로 두면 대부분 밝아졌다. 내가 전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30여 년 내 개인 경험을 말하는 것뿐이다.
밝아진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감을 얻고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 했다. 나는 강요하지 않았다. 앞에서 목줄로 끌 듯 장애 학생을 인도하지 않았다. 그런 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나의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을 뿐이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면서 정말 수정되어야 할 때만 간섭하였다. 이 ‘간섭’을 전문용어로 ‘중재’라고 할 수 있다.
간섭은 학생마다 달랐다. 어찌 되었거나, 한 번, 한 달, 혹은 한 학기에 서너 가지 이상의 목표는 두지 않았다. 그 이상 억지로 뭘 가르쳐야 하나? 억지로 가르친 것이 얼마나 유지될까? 마치 평생의 내 수학 시간과, 수학 시험 결과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니고, 공부하는 척은 하게 할 수 있지만, 공부하는 척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일찍 알았다. 한 번도 성적으로 우리 애들을 나무란 적이 없다. 하긴 성적표를 본 적도 거의 없다.
한 번은 딸이 거의 울음으로 성적표를 내놨다. 전교 1등을 하던 애였다. 나는 딸이 몇 번 전교 1등을 했는지도 잘 모른다. 울음은 전교 1등을 처음 놓쳤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딸에게 공부만 잘하면 남 밑에서 일한다고 했다. 남과 비교하는 성적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알려주었다.
그 후부터 딸은 성적에 덜 연연했다. 딸은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학비가 전국에서 아마 가장 비싼 축에 들어갔을 것이다. 대학은 7년인가를 다녔다.
하지만 그 덕에 딸은 지금 부모에게 어느 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대학 때부터 창업하여 지금까지 그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수입도 나보다 많다. 언제 사업이 어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성적에 덜 연연한 것처럼 딸은 잘 이겨낼 것이다.
위축되게 하지 않으며, 결과가 아니라 노력에 칭찬하고, 권위적인 교사가 되지 않는 것. 특수교육에서 내가 사용한 방법이다. 어쩌면 지적장애 학생을 가르치던 이 방법이 일반적인 학생에게도 먹혀서 그들을 영재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보면 특수교육에서 지적장애를 전공한 나는 영재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딸은 그런 한 실례일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