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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동협 Mar 07. 2024

내 인생의 샛길

[영화평] 사이드웨이

우리 부부의 모처럼 영화 관람도 제목처럼 샛길로 샜다. 집에서 나설 때는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애비에이터'를 보기로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네버랜드를 찾아서'로 마음을 바꿨다. 결국, 표를 살 때는 우리 앞에서 서 있던 미국 아줌마들을 따라서 '사이드웨이(Sideways, 2004)'를 골랐다.


무슨 이유로 이 영화를 선택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두 시간 동안 두 남자의 샛길을 유쾌하게 마음껏 보고 즐겼다. 그 샛길에서 우리는 예사롭지 않은 유머와 삶에 대한 아름다운 비유를 만날 수 있었다. 우선 우리를 샛길로 인도해 준 앞의 두 아줌마에게 감사드린다.


샛길로 빠져버린 두 사내


말 그대로 두 사내는 정상적인 생활을 벗어나, 일주일 동안의 일탈에 빠진다. 포도주에 대한 상당한 편력과 해박한 지식을 갖춘 영어교사인 마일즈(폴 지아마티)는 결혼을 앞둔 친구 잭(토마스 헤이드 처치)을 데리고 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중부, 산타 이네즈(Santa Ynez) 계곡으로 여행을 떠난다. 일주일 후면 부잣집으로 장가갈 예정인 잭은 한물간 배우로, 지금은 싸구려 광고를 찍으며 생계를 이어간다.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샛길이다. 아무리 인기 없는 배우라도 학교 교사와 무슨 공감대를 찾을 수 있겠나? 잭은 여행지에서 만난 아무 여자랑 어울리려는 못 말리는 바람둥이지만, 마일즈는 낯선 사람과 쉽게 섞이지 않고, 개인적인 취미인 포도주나 즐기는 선생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내지만 총각파티를 즐기기 위해서 떠난다. 그냥 포도주 맛보고, 골프 치고, 따사로운 햇볕을 쬐면서 여가를 보낼 계획이었던 두 사람은 뜻하지 않는 두 여인을 만나면서 샛길로 빠진다. 웨이트리스인 마야(버지니아 매디슨)와 포도주 양조장에서 일하는 스테파니(샌드라 오)는 잭과 마일즈의 여행에 끼어든다.


계획했던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게 인생이듯, 잭과 마일즈의 삶도 자꾸만 샛길로 흘러간다. 잭은 텔레비전 배우로 성공하지 못하고, 광고에서 상품을 소개하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잭은 낯이 익다고 다가온 사람들에게 출연한 광고의 문구를 반복하는 자신이 피에로처럼 느껴진다. 잭은 자신을 배우가 아닌 광고모델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얄밉다.


마일즈는 자신을 소설가라고 소개하지만, 정작 출판한 소설은 하나도 없다. 마일즈는 소설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 놓았고, 출판 여부가 결정 나지도 않았다. 소설의 내용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마일즈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할 뿐이다. 실패한 소설가와 무명의 배우가 만난 건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정상의 궤도를 벗어난 두 사람의 우정에는 필연적 이끌림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 나를 자극한 부분이 바로 '샛길' 때문이다. 인생의 계획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맞춰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의 인생도 새롭게 생긴 계획으로 자꾸만 수정되어서 지금에 이르렀다.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떠돌았던 적도 있다. 한때는 이런저런 꿈을 다 포기하고, 대기업에 들어가 보겠다고 도서관에서 영어공부를 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은 어떻게 흘러와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겠다고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적어도 잭이나 마일즈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살아보려는 끈기가 내게는 없어서, 나는 자꾸만 샛길로 빠져버린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잘못 들어선 샛길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샛길이 어느새 내게 중요한 대로가 되었다.


영원한 사춘기


사춘기라면 어린아이에서 성년기를 거쳐 가는 통과제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마일즈와 잭도 인생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사춘기에 여행을 떠난 셈이다. 잭은 코앞에 닥친 결혼에 망설임과 불안함이 뒤섞인 상태이고, 마일즈는 이혼한 아내를 마음속에서 잊지 못해서 새로운 관계가 두렵다. 두 사람 모두 인생에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면서 방황하고 있다. 그 방황이 일주일의 여행으로 정리될 턱이 없다. 포도주나 마시고, 골프 치고 놀면서 시간이나 흘려보내려고 여행을 떠났다.


우리의 인생에도 실연으로 괴로워하거나, 결혼으로 독신생활을 정리하거나, 회사에서 은퇴하는 정신적인 공황기를 겪을 때가 있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전작 영화 '어바웃 슈미트'에서도 은퇴한 보험회사 중역의 일상을 미묘한 심리묘사로 잘 보여준 바 있다. 페인 감독은 인생의 방황기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추구한다.


슈미트는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을 잘 돌봐주던 아내를 잃고 실의에 잠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도 결혼하여 자신을 떠나려 하면서 슈미트는 더욱 외로워진다. 아내와 딸을 떠나보내야 했고, 혼자의 삶에 아직 준비가 안 된 슈미트는 마일즈와 잭처럼 여행을 나선다. 그 외로움은 달래지지 않고, 여행하면서 슈미트는 더욱 혼자임을 깨닫게 되지만, 아프리카의 가난한 소년을 후원하면서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마일즈는 자신의 소설이 출간되기를 기다리면서 늘 초조하다.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몰라서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소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교사에서 소설가로 거듭나기를 기대하는 나이 든 청년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하기는 잭도 마찬가지다. 아직 결혼 경험이 없는 잭은 결혼을 잘하는 것인지도 불안해한다. 어이없게도 잭은 마일즈에게 자신이 결혼해야 할지 판단해 달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신중한 마일즈가 남의 인생에 관해서 쉽게 참견하지 않는다. 미래가 불안한 두 사람은 내면은 사춘기를 맞은 소년을 떠올리게 한다.


인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춘기의 연속이다. 자신이 내린 판단으로, 혹은 어쩔 수 없는 외부의 힘으로 결정된, 삶을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그 과정을 겪고 이겨내면서 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맥없이 쓰러진다.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으며, 우리는 새로운 사춘기를 보내야 한다. 청소년기에 겪는 신체적 사춘기는 한 번만 일어나지만, 정신적 사춘기는 평생에 걸쳐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사이드웨이'는 성급하게 하는 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성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우리는 적어도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성숙한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추하게 늙어가는 사람을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70대 노인은 입양한 아이를 성폭행하고, 중년의 사업가는 신분을 빌미로 불법 체류자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왕년에 노동운동을 했다던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어 노동자 탄압에 앞장을 선다. 그런 세상이다.


개인의 성장도, 사회의 진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익숙해진다는 말의 다름이 아니다. 성자들이 인생의 깨달음을 얻듯이, 모든 사람이 늙어가며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혜로운 노인'의 비유는 적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우리는 세상일에 익숙해지고만 있다. 우리는 인생을 되돌아볼 사춘기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포도주를 닮은 인생


이 영화는 포도주에 대한 상식을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포도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기초적인 지식을 일러주고, 상당히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포도주의 은유를 들려준다. 포도주의 문외한인 나는 영화를 통해서 포도의 품종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배웠고, 근사한 포도주 양조장을 살짝 구경할 기회도 얻었다.


잔을 흔들어 포도주와 공기를 적당히 섞어주어야 숨어있는 향기도 맡을 수 있다고, 마일즈는 포도주를 전혀 모르는 잭에게 자세히 알려준다. 코를 잔 깊숙이 박아서 서서히 맡으면, 온갖 과실, 흙냄새, 치즈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다는 말에 잭은 혀를 내두른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는 것만으로 관객이 포도주 기초강좌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나는 마일즈가 가르쳐 주는 대로 모든 것을 따라 하는 잭이 된다.


포도주는 여러모로 사람의 인생과 심하게 닮았다. 사람도 포도주도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더 맛있는, 혹은 멋있는 상태에 이른다. 기후와 맞는 품종의 포도를 심었고, 자라는 동안 햇빛을 얼마나 받았고, 비를 충분히 맞았고, 사람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 키웠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는 것이 포도주다. 포도를 키우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이 포도를 어떻게 숙성시키는 것이 맛을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어떻게 태어나는가보다 어떻게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사람답게 성숙하는데 핵심이 된다. 바꾸어 말해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건 '본능'이 아니라 그 토양이 되는 '문화'다.


http://www.youtube.com/watch?v=YS9ocP6FNvM

역설적으로 포도주를 마실수록 이성적인 사람도 본능에 충실한 사람으로 변한다. 포도주 자신은 성숙해지지만 그걸 마시는 사람은 미숙해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평소에 자신의 내면을 단련시켰던 마일즈도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본능적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마일즈는 이혼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속내를 고스란히 다 털어놓는다. 거르지 않은 포도의 찌꺼기처럼 감정의 덩어리가 선연히 드러난다. 솔직해지는 것이 과연 미숙해지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해지는 것이 성숙한 행동인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비겁하게 달아나는 건가?


극단적으로 말해, 거짓말과 위선적인 태도로 상처받지 않으려는 사람을 우리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더 현명한 사람이다. 위선자들에게 포도주를 들이부어서 진실을 고백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영화는 우울하다기보다 배꼽을 쥐게 할 정도 웃기는 영화다. 너무 민감해서 아무 곳에서 자라지 못하는 포도인 '피노 누아'에 자신을 비유하는 마일즈와 포도농장을 가꾸는 꿈을 꾸는 마야의 로맨스도 아름답다. 포도와 인생에 대한 근사한 성찰을 보여주는 마야의 대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친다.


포도주는 우리네 인생이랑 너무나 닮았어요. 난 포도가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너무 좋아요. 그 여름에 해가 어떻게 비추었고, 날씨가 어땠는지 생각하는 게 너무 좋아요. 포도를 정성스레 가꾸고 따던 모든 사람을 가끔 생각해요. 포도주가 어떻게 숙성해서, 내가 포도주를 따는 그 순간이 다른 날, 다른 시간과 얼마나 다를지 상상하는 게 정말 좋아요. 한 병의 포도주가 인생 그 자체죠. 포도주가 자라고, 숙성하고, 그리고 더 복잡미묘해지죠. 그러면, 그러면, 그 맛이 지랄 맞게 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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