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후 달리다
어김없이 비는 찾아와
잿빛 하늘은 제 빛을 잃고
풍경은 엷게 바래진다
설명할 수 없는 적막이
스며들 듯, 천천히 다가온다
식사와 산책,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무기력을 밀어내고
닫혀 있던 내 안의 빗장을
조심스레 풀어놓는다
걸음은 몸속의 기운을 깨우고
잠깐의 쉼은 생기를 불어넣는다
자연스레 문밖으로 향하는 발끝
쌀쌀한 공기와 서늘한 바람 속에서
몸은 서서히 달아오르고
힘이 들어가던 출발의 벽이 무너진다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천천히 달리는 법을 배웠다
꾸준하지 못했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그러나 확실하게
숨이 고르고
생각이 열린다
대지를 딛는 리듬이 걱정을 부수고
몸과 마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 갠 뒤 흐린 하늘 아래
찬 공기는 속의 탁함을 씻어내고
땀방울은 피로를 흩어보낸다
길가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우울한 하루의 무기력은
흘러가는 빗물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비 갠 후, 멈추지 않는 걸음
내 안의 침묵이 걷히고
생기가 되살아난다
지나가는 비처럼
무거움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