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이해할 수 없으면 떠나라
평생에 직장을 두 번 정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내게 4년차 때 발생한 이직은 다소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내 권총에는 한 발의 총알밖에 남지 않게 돼버린 격. 그러나 나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단순 퇴사는 나의 선택지에 없었기에 이직밖에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30살. 4년 차. 꽤나 이른 나이에 이직이라는 행위를 감행했다. 이직을 하게 된 이유를 꼽으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단연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나에게 커리어를 줌과 동시에 파괴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사건(위기)이 발생했고 난 그저 순차적으로 더 나은 곳에서 커리어를 계승해야 할 기회를 모색했을 뿐이다. 그렇게 두 달 사이에 나의 회사 타이틀은 바뀌었다. 물론 내 직책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유통업계 MD로서 일해왔다. 약 3년간 다양한 협력업체들을 만나 어떤 상품을 어떤 가격을 매겨 시장에 판매할지를 논의해 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상품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새로운 상품들을 마주하는 하루하루가 설레었고 좋았다. 협력업체들과 업무 외적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상품의 소싱 및 판매과정에서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며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렇게 협력사들과 한 해를 나고 나서 나누는 감사 인사 속에서 보람을 느꼈다. 나는 MD라는 직무가 마음에 들었다. 운이 좋게도 말이다.
3년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기업이었기 때문에 때때로 부딪히는 회사 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참고 버틸 수 있을 만큼 나는 내 업무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내 참을 수 없을 만한 일이 생겼다. 3년 차, 이제 비로소 MD다운 MD로 거듭나려고 하던 찰나에 회사는 나를 전환배치라는 명목으로 타 부서로 발령시켰다. 제너럴리스트를 키우겠다는 회사의 굳건한 의지인지 타 부서로의 이유 없는 전환배치인지 알 길이 없었다. 회사는 나에게 전환 배치될 것이라는 단 한마디의 언질조차 없었다. 그렇게 한 순간에 나의 커리어가 단절됐고 기존 업무와는 무관한 지원부서로 발령받아진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관행적으로 업무와 무관한 전환배치는 우리 회사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니 매우 당황스러웠다. 새로운 부서와 업무에 적응해야 할 것이라는 당혹감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던 나의 커리어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한 순간에 단절될 수 있다는 충격이었다.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MD로서 보여준 실적이 영 바닥이라서 인사팀에서 어쩔 수 없이 단행한 불가피한 처사였다고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회사가 나에게 준 것은 단지 PDF 파일 속 나의 이름과 전후로 나뉜 나의 부서명이었다.
당혹감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묵묵하게 일해왔고 힘들다고 투정 부리지 않았다. MD로서 협력사들을 잘 관리해왔고 좋은 실적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게 회사가 나에게 주는 보답이라고 생각하니 그 순간 회사에 대한 온갖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인사팀은 전환배치 내용이 담긴 pdf파일에 이름 석자 쓰는 행위가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무게가 걸린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아무 언질 없이 나에게 이럴 수는 없는 처사였다. 팀장님에게 가서 따져볼까? 과장님에게 물을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돼버렸는지 너무 궁금했고 그들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행동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어 담는 격. 굳이 모양 빠질 필요 뭐 있겠나. 최대한 차분하게 행동했고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자리를 벅차고 화장실로 가서 거울에 있는 나 자신에게 나지막이 뱉은 한마디는 “괜찮아, 이직하면 돼.”였다.
나는 대개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두 가지라고만 생각해왔다. 첫째, 업무과정 속에서 겪는 직무 스트레스. 둘째,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관계적 스트레스. 그러나 내가 이직을 결심한 이유는 다름 아닌 나에게 다가온 세 번째 이유다. 회사 내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조직문화.
나는 나의 직무를 좋아했으므로 직무 스트레스는 비교적 높지 않은 편이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때때로 갈등이 없지는 않았으나 표면적으로 모두에게 살갑게 대해주며 회사생활을 무난하게 해왔다. 그래서 나는 우리 회사에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게 가진 유일하고도 강력한 불만은 바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회사 내 시스템이었다.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끝도 없는 '왜'가 발생했다. 나는 평소 나 이외의 것들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렇게 까지 예민하게 굴 수 있다는 것은 놀랍다. 내가 회사를 바꿀 수 없다면 비합리적인 사실을 알더라도 순응할 수 밖에. 그러나 내가 보다 합리적인 곳으로 이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안다면 그 누가 비합리적인 조직에서 눈을 감으려 하겠나.
왜 업무 성과가 아닌 연차 순으로 평가를 매기는 거지?
왜 직원들에게 언질 없이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의 정기적 전환배치를 단행하는 거지?
왜 남자 직원과 여자 직원을 대하는 상사의 태도가 극명하게 다르지?
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거지?
왜 성과급 지급 기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는 거지?
왜 기존 직원들을 동기 부여시키는데 노력하지 않고 신입사원들을 무더기 채용하는 거지?
회사의 문화라는 말은 사실 회사가 직원을 대하는 태도, 평가체계, 인사제도, 복리후생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으로 직원이 체감하는 조직문화는 사실상 직원이 회사생활을 해나가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다른 말로 비합리성을 체감한 한 명의 직원으로서 나는 회사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가 다 똑같지 뭐’라고 생각하는 동료 직장인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 세상에는 수천 개 이상의 회사가 존재하고 그곳의 문화는 그 개수 이상으로 다양하다. 문화라는 것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만들어낸 하나의 성격이므로 개개인의 성격이 모두 다르듯이 모든 회사가 다 똑같은 문화를 가질 수는 없다. 회사가 다 똑같이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인해 다니는 데 힘이 들 수는 있더라도 말이다.
비합리성 속에서는 때때로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발생한다. 정량적인 평가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할 평가가 정성적인 평가로 불공정하게 이루어진다. ‘일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로 평가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얼마나 조직에 잘 어울리느냐’가 때로는 평가의 주요 항목으로 자리 잡고 대개 힘없는 인사팀은 이에 대해 기준점을 제시해 주지 못한 채 걷돈다. 실력보다 정치가 우선시되는 곳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치가 중요할 수는 있어도 최소한 직장인의 본질인 직무 능력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 정성적인 평가를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것은 기업의 본질인 이익창출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함께 권력을 나누는 놀이터로 만들 뿐이다. 그런 조직은 서서히 내부로부터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직을 하지 않는 것은 학생 시절 마치 공부하지 않으면 미래에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에 안주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속한 집단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내곤 한다. 자기소개를 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개인적 성격이나 취미, 특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보다 우리가 졸업한 학교나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한민국과 같은 고맥락 사회에서 이는 익숙한 문화적 특징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나라는 개인보다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참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집단주의에 계속해서 익숙해지면 개인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속한 기업은 내가 아니다. 조직과 나를 동일시 여기고 그 속에서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한다면 조직이 나를 버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내가 다니는 곳에서 나왔을 때 과연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나라는 사람은 어떤 경력을 쌓았고 이를 통해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함이 전문직 인력과는 차별화되는 직장인의 숙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어느 기업에 어떤 직책으로 다니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업무를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노동자일 뿐이지 않은가? 언젠가 우리는 현재 조직으로부터 퇴사(당)한다. 산업 내에서 탐낼 만한 노동자 혹은 어디서든 성공할 인재는 오로지 실력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전환배치를 받은 당일, 나는 집에 와서 구직 사이트를 뒤졌고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OOO그룹에서 경력직 MD를 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 됐고 내가 다니던 회사와 동종업계였기 때문에 이곳으로의 이직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그날 밤을 새우며 3년 만에 자기소개서를 썼다. 본격적인 이직 준비 과정과 팁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