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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하 May 30. 2021

마흔이되도 제 얼굴에 책임 안 질 겁니다.

국제적인 범죄형 인상


지난 2월 초 슬쩍 입국했습니다. 중남미 모처에서 멕시코시티를 거쳐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멕시코 시티에서도 공항 수속 밟으면서 붙잡혀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사진도 찍고 했습니다. 나 마약 없다. 나 ㅇㅇㅇ하는 사람이다. 나 미국도 문제없이 잘만 다녔다 등등등 질답을 주고받았습니다. 뭐 범죄 이력도 없고 당장의 혐의도 없으니 곧 풀려나긴 했습니다만, 쓸데없이 의심을 사는 게 맘이 편하지 많은 않습니다.


미국 경유할 때도 꼭 잡혔습니다. 입국 수속 중에 짐 검색하는 곳까지 끌려가기도 하고, 몇 번은 열 손가락 지문을 다 찍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길 가다 잡히고, 자전거 타고 가다 잡히고, 가만히 서있다가도 잡히고, 집에 있는데 경찰이 찾아오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뭐 한 두 번 붙잡힌 게 아니다 보니 왠지 범죄형 얼굴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실은 한국에서도 한두 번 잡힌 게 아닙니다. 길가다가 경찰에게 잡혀서, 주변에 강도 신고 들어왔다고 신분증 보여달라고 하기도 하고, 자전거 여행 중에 텐트를 치고 있으려니 경찰차가 출동한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모 전문직 시험을 보러 들어갈 때도 “여기 ㅇㅇㅇ 시험장인데 어디 가시냐?”라고 정문에서 붙잡혀서 신분증과 수험표를 보여주고 나도 응시자요 하고 들어갔었습니다. 왠지 외모에 따른 차별을 받는 거 같아 억울했던 적도 많았죠.


이제는 뭐 그러려니 합니다. 죄가 많은 얼굴이구나 하고 말이죠. 안 그래도 얼굴이 범죄형이라는데 몸은 괜히 키워놔서 각국 경찰 및 공항당국에게 왠지 잡고 싶어지는 인상을 더 주게 된 것 같습니다.


어쩌다 각국 경찰 관계자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폭소를 하며 좋아라들 하더군요, 자기들 보기에도 일단 잡고 싶은 인상이랍니다. 일단 잡고 나면 이력이든 혐의든 나올 것 같아서 경찰 입장에서는 아주 유혹적인 외양이랍니다. 성과가 될 얼굴이라니... 나한테 욕하는 거냐 지금 하고 욱할 뻔했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잘 참았습니다.


그래도 실이 있으면 득도 있는 법이죠. 이런 외양으로 사는 게 마냥 나쁜 일은 아닙니다.


특히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흥가 또는 지난 2년간 살았던 그냥 전반적인 치안이 아주 안 좋은 나라에서는 나름 먹어주는 얼굴입니다. 분명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길을 걷다 마주친 검은 양복을 빼입은 위험해 보이는 아저씨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기도 하고, 옆구리에 칼찬 아저씨, 총찬 아저씨 등등 다들 아주 살갑고 공손하게 인사해줬습니다.

아 직업상 총칼이 필요해서 차고 있는 거지, 저 사람들 실은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길 가다 마주친 몇몇 외국인들이 던지는 질문을 받고 나서는 아... 이 사람들한테도 내가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깨달았죠. 너 뭐하는 사람이야? 이 나라에서 뭐해??.... 아니 난 ㅇㅇㅇ하는 사람이야 라고 하면 선뜻 믿지 않더군요.


저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갖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험한 곳으로 보기 때문에, 적어도 단순히 약해 보이거나 만만해 보여서 위험에 처하게 될 일은 없겠구나 하고 만족하고 살려고 합니다. 선한 인상 만들자고 얼굴을 뜯어고칠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사십 대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걱정입니다. 대체 뭘 책임져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그런 말 자체도 저처럼 성실하게 노동을 하며 사는 준법시민에게는 상당히 상처가 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겨먹은 걸 대체 뭘 어떻게 책임지란 말인가요.


다만, 마흔 줄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책임이 생기기 때문에, 말과 행동을 가벼이 하지 말라는 의미로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한 거라면 뭐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됩니다만, 그래도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한건 너무 했어요.


“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은 타고나길 노화가 빠르거나, 소심해 보이거나, 신경질적으로 보이거나, 저처럼 공격적으로 보이는 사람 등등을 차별하는 말입니다. 유순해 보이는 선해 보이는 얼굴 뒤에 칼을 숨긴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마흔이 돼도 제 얼굴에 책임을 지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말과 행동에는 기꺼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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