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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하 Feb 12. 2023

나이든 부자의 작별인사

한국에 남기로 한 아버지와 떠나는 아들

"어디를 가든 한국에 있는 아버지 잊지 마라. 잊으면 안 된다."는 큰 아버지의 말은     

아버지를 잊지 말라는 당부보다는 내가 곧 아버지를 잊고 말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렸다.               


",  아버지. 그럼요. 저한테는 아버지 밖에 없는데요. 외국에 나가더라도 자주 연락드리고, 일이년에  번씩이라도  찾아  겁니다.  아버지도 건강하시고요."  대답에는 확신이 없었다. 으레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하는 애매한 기대 속에서 책임감 없이 내뱉는 말이었다. 남이  말처럼 멀찍이 들렸다.               


아버지께 전화를 건네며 큰 아버지 말을 이야기해 드리니, 허허 웃고 마신다. 마흔이 넘은 아들과 일흔이 넘은 아버지 둘 모두 다시는 재회하지 못할 수 있다고 예감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후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서  홀로 지내오셨다.    전에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  식구가 함께 살았다. 식구 간에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아끼는 정이 있었다. 아들이 독립해 떠나고, 몸이 약한 아내와 이십여   살아온 곳에 이제는 아버지 혼자 남겨졌다.               


지방의 스물세 평 남짓 되는 방 세개짜리 노후화된 아파트에 아버지가 쓰는 공간은 방 하나에 거실로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일부러 인지 현관 옆의 제일 작은 방을 거처로 정했다. 요와 이불, 베게와 옷가지 몇 점, 휴대폰 충전기와 성경 구절이 적힌 네발달린 접이식 상이 아버지 세간의 전부였다.

                

안방은 아들네 식구들이  달에  번씩 내려오면 묵고  , 생전에 어머니가 쓰던 화장대와  침대, 성경책과 행거들은 모두 치워져 휑했다. 어머니 시집올  해왔다는 열두  짜리 짙은 갈색의 원목 장롱만이 과거에 부모님이  방에 살았었다는 증거처럼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베란다로 통하는 하늘색 창틀은 색이 바래 회색처럼 보였고, 창밖을 내다보면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방충망 너머로 미용실과 속옷가게, 노래방, 음식점, 술집 등이 너저분하게 들어선 7층짜리 상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들은 아버지가 혼자서도 잘 견뎌내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아내가 없는 삶이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하지 못했다. '힘들다. 갈 곳이 없다. 친척들에게도 기댈 수가 없다. 다들 나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스스로 힘겹다고 할 때도, 아들은 아버지가 혼자서만 지내려고 하셔서 그런 거라고, 어머니 다니시던 교회라도 나가보시라고 어디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사시라고 대꾸할 뿐 아버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사실 아들은 홀로된 아버지가 부담스러웠다. 아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된 아버지가 결국 함께 살자고 요구할까봐 부담스러웠다. 아들은 마흔 줄에 접어들기 직전에야 스무 평 남짓되는 집을 마련해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다. 외국을 오가며 일하는 직업을 가진 아들은 그 비좁은 집에도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이년 남짓 밖에 안 된 아들은 곧 다른 나라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가 과거처럼 강인할 거라고 믿기로 했다. 망치질과 대패질로 굳은살이 잔뜩 박인 단단한 손, 벽돌과 시멘트로 가득 찬 질통을 등에 지고도 몇 층씩 끄떡없이 오르내리는 사내가 땀내와 덜 굳은 시멘트 냄새를 풍기면서 젊었을 적 그대로 꼿꼿하게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 이미 독립해서 가정을 꾸린 아들의 삶에 방해가 없을 테니까. 아플 때면 아빠를 찾으면서 울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온 아버지 품에 안겨 잠들던 어린 아들은 이제 없었다. 그렇게 아들은 아내를 잃고 홀로된 늙은 아버지를 외면하기로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했다.    전에 면접관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망설 임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공사 현장에서 일평생 막노동을 하면서 아픈 아내와 외아들을 건사했다. 몸이 아플 때도 참아가며   열두 달을 일만  사람이다. 이렇다할 취미도 어울리는 친구들도 없이 가족만을 위해 평생을 희생한 아버지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있겠느냐고 했다.               


십여 년 전, 첫 월급을 받아 아버지에게 자전거 한대를 사드리면서 아들은 이제부터 아버지의 고생에 대해 보답해 나가기라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삼십 몇 만 원짜리 국산 자전거 한대가 무슨 고급 외제차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하고 다니셨다. 이거 우리 아들이 첫 월급 받았다고 사준 거여. 아니 뭘 내가 해 준게 뭐가 있다고  지가 몇 푼이나 받는다고 이런걸. 사주고 그러나. 허허.                


아들의 일은 점점 더 바빠졌고, 자기 시간을 보내느라 고향에는 몇 달에나 한번 내려오면 다행이었다. 부자간의 거리는 이미 멀찍했다. 취직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한 아들은 곧 외국으로 떠났다. 사오년이 지나 아들이 돌아온 그 해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이제 아들은 다시 외국으로 떠난다.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아들 본인의 삶에 방해가 안 될 정도까지만 그럴 뿐이었다.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아들이 본인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본인의 친구들은 상처하고 자식들과 함께 산다더라. 는 이야기를 두어 번 이야기하고 말았을 뿐, 결국 함께 살고 싶다는 이야기는 끝까지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함께 떠나자는 아들 내외의 말도 거절했다. 아들내외와 손자손녀들과  개월을 보내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외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노라고 했다. 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들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와 며칠을 보냈다. 아버지는 출국 준비를 위해 상경한 아들과 통화하면서 "어쩐지 마음이 휑하다. 혼자 어찌 지낼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 걱정은 말아라."고 강한 척을 하다가도 "나도 나이가 일흔이니 이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아들은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이미 몇 해 전 심장 질환으로 수술은 받은 적이 있었고, 평생을 힘겨운 노동을 견딘 탓에 몸이 성치 않았다. "아버지 그러게 같이 가시죠. 같이 가자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도 일이년에 한 번씩은 들어올 거예요. 올 때마다 찾아뵙고, 외국 나가서도 자주 연락드릴게요." 라고 대답은 했으나, 이번에 고향에서 만난 것이 부자간의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다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부자는 그렇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작별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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