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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Feb 26. 2021

이혼 가정에서 자라 환란도 많다지만

가족은 제각각의 사랑을 싣고

  오늘은 이혼가정에서 자라 이런 것들이 참 아팠다는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당연하겠지만 나의 기억은 지극히 내 위주이며, 본래 상처라는 것이 내가 남에게 입힌 것 보다 남에게 입은 것이 더 생생한 법이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나의 유년기도 그럴 것이다. 이혼가정에서 장녀로 자라며 환란도 많았다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다들 각자의 아픔과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말 못 할 복잡한 사정들이 있었을테다.      


  <금쪽같은 내새끼>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육아의 신 오은영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부모님을 함께 코칭해주시는 프로그램인데 이혼가정이 종종 나온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아, 엄마가 저런 상황이었겠구나.’하고 늦게나마 엄마의 마음을 조금쯤 이해하기도 했다. 

  아무튼 오은영 선생님께서는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각각의 가정을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신다.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제각각 자신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 상처들로 인해 너무나 예민해져서 서로에게 더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결국 그 상처를 함께 나누고 치유해 나갈 수 있는 것도 가족이라고.     


  이혼 직후, 엄마는 집을 구하기 전까지 잠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산 적이 있다. 그 때 엄마는 학원 일을 하고 있어서 밤늦게 퇴근을 했고 나는 주중에는 아빠랑 주말에는 엄마랑 시간을 보냈다. 금요일 밤에 엄마한테 가면 엄마가 퇴근 전일 때가 있었다. 그 전까지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있는 집에서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당시에 외할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진 직후라 거동이 불가능하셔서 외할아버지와 엄마가 번갈아 간호를 하던 상황이었다. 주말이 되면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를 간호하면서 나와 내 동생까지 보살펴야했던 것이다. 나는 고작 8살이었고 아무도 나에게 그런 현실을 설명해준 적 없었지만, 엄마가 없는 외할아버지네 집에서 엄마를 기다려야만 하는 그 상황이 묘하게 불편하고 눈치가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시끄럽게 굴지 않았고 배가 고프다든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든가 하는 말을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유는 생각이 안 나는데(동생이랑 사촌동생이랑 울며불며 싸웠나?) 아무튼 외할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나랑 내 동생보고 아빠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낫기 전까지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울면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 이제 다시는 엄마를 못 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겁이 나고 무서웠다. 외할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외할아버지 마음도 이해가 된다. 이해가 너무 되어서 가슴이 묵직해 질 지경이다. 중증환자 하나에 아이 셋을(그 때 외삼촌의 딸인 외사촌동생도 외할아버지가 키우고 있었다.) 키우며 외할아버지도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얼마나 힘에 부쳤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다.      


  당시에 나는 진짜로 다시는 그 집에 못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야 그 말이 홧김에 나온 말이구나 싶지만 그 때는 정말 청천벽력같이 무섭고 또 절대 뒤집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안그래도 외할아버지와 함께 매주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불편했는데 그렇게 쫒겨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 다시 엄마에게 가는 날이 되었다. 그 날은 동생 없이 나만 엄마한테 가게 되었는데, 또 엄마의 퇴근이 늦어져서 혼자 외할아버지가 있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아빠가 외할아버지네 집 앞까지 태워주었고 나는 집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됐는데.. 그 초인종 하나를 못 누르겠어서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서 있다 보니 지루해져서 아파트 놀이터, 슈퍼, 지하주차장까지 다 걸어 다녔다. 그러다 오줌이 마려워졌다. 다시 집 앞으로 갔다. 그래도 그 초인종은 정말 못 누르겠는거다. 참다가 참다가 엄마한테 전화를 하려고 공중전화 부스에 갔다. 돈도 없어서 수신자부담으로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언제 오냐고 묻는데 ‘지금 간다’는 엄마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오줌을 쌌다. 그 날 입은 바지도 기억이 난다. 자주색 바지였는데 바지 색깔이 짙은 자주색이 되면서 밑으로는 오줌이 뚝뚝 흘렀다. 공중전화 부스 바깥에서 오줌에 젖은 바지가 마를랑 말랑 할 때 쯤 엄마가 도착했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며 조금 웃었고 조금 혼냈다. 바보야? 초인종도 못 누르게! 하면서 장난스럽게 넘겼다. 엄마가 ‘외할아버지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 홧김에 한 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다. 엄마 뒤에서 쭈뼛대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다시 나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외할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를 반겨주셨고 그 뒤로는 잘 기억이 안난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도대체 뭐라고 결론을 내야하나 난감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 해봐도 정신승리도 힘들겠고 누가 봐도 좀 안쓰러워 보이는 것 같아서 브런치에 올릴까 말까도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이라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해보려 한다.      

  나는 펑펑 울었지만 저 상황을 돌아보면 어느 한 사람도 특별히 잘못을 한 게 없다. 이혼한 엄마도, 이혼한 딸을 둔 아빠도, 이혼한 엄마를 둔 딸도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어찌됐건 엄마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었고, 외할아버지는 간병과 육아를 병행해야만 했고, 나는 다음번에는 그 집 초인종을 누를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강해졌다고 표현하면 맞을까? 나는 ‘인생’ 그 자체에서 오는 것들과, 또 살아있기에 겪어야만 하는 수많은 것들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각자의 사정으로 서로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또 울기도 했지만 그 삶 속에서 결국 우리는 서로를 치유하고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 여행을 하면서, 살을 부대끼면서, 같은 밥상에 앉아 타액을 나누면서, 밤을 꼴딱 새워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여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했다. 물론 내가 오줌을 싼 그 날로부터 10년도 넘게 지나서이긴 했지만..


  아무튼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나는 그렇게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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