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같은게 있지 않을까?
몇번이고 반복되는 같은 꿈. 나는 이제 꿈이 제발 제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기분이다. 4년 전에 땅에 묻혀 이제는 뼈를 뺀 살점과 근육은 모조리 흙이 되었을 엄마. 그 엄마가 온전한 육신을 한 채 먹기도, 마시기도, 심지어는 물 속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는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처음 몇 분은 25년간 그랬듯 시원하게 웃고 떠들다가 이내 이상함을 느낀다. 이상함에 질문을 한다. 아무래도 묻지를 않았어야 하는건가, 이렇게 묻기만 하면 엄마는 입도 닫고 모습도 감추어버린다.
ㅡ엄마, 근데 엄마는 죽었잖아?
cuddle, 끌어안는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이다. 우리는 주로 ‘커들’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쉬는 날이면 나도, 엄마도 한 침대에서 꼼짝 않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을 즐겼다. 숟가락 두 개가 틈 없이 포개지듯 우리는 서로의 몸을 곱게 겹쳐 끌어 안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여느 부자 혹은 부녀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어딘가 우습지만 내가, 우리 엄마와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은 왠지 무한하게 아름답게 느껴지곤 했다. 엄마의 몸 전체가 나의 몸 전체에 여백 없이 밀착되어 있는 그 느낌이 좋았다.
꿈에서도 엄마는 늘상 그런 자세로 등장한다. 오늘 새벽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좁은 침대에 엉겨 서로를 끌어안거나, 혹은 서로의 다리가 베개인 양 각자의 다리를 척 올려놓고 있다. 우리는 불편한듯 편한 자세로 누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엄마의 얼굴은 꽤나 생기가 있다. 엄마가 죽던 해 보다 몇 해는 전의 모습 같이 보인다. 바깥 거실에서는 외할아버지가 과일을 깎고 있다. 동생은 티비를 본다. 엄마와의 대화 소리 너머로 거실의 티비 소리가 어른어른 거리는 그 분위기가 따뜻하다. 나는 엄마와 실컷 이야기를 하다 말고 이상함을 느꼈는지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ㅡ엄마, 내가 보여?
난데없이 거실로 나가서 외할아버지와 동생에게도 물었다.
ㅡ내가 보여?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 지금과는 달라진 꿈의 양상을 알아챘다. 꿈에서 죽은 이는 엄마가 아닌 나였다.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힌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고.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갑작스런 교통 사고로 죽었다. 죽었지만 다른 차원에서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며, 내가 죽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죽은 이들이 사는 곳은 다른 차원일 뿐 내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그곳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목적지를 달리하여 다른 차원에 살고 있던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살아있는‘ 엄마, 외할아버지, 동생의 식사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편안했고, 그들 또한 편안해보였다. 나를 잃고 한동안 슬퍼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긴 했지만, 어쩄거나 엄마는 편안해보였다.
어쩌면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갈림길
엄마와 나는 같은 버스 혹은 기차 옆자리에 앉아 25년정도 여행 길을 떠나왔다. 그러다 가는 길이 달라 엄마는 먼저 내렸다. 길이라는게 워낙 복잡하고 세상이라는게 워낙 광활해서 내렸다 하면 다시 탈 수는 없다. 혹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너무 분명해서 다시 타고자 하는 의향도 없을지 모른다. 말 그대로 ‘하차’다. 내렸다고 해서 그 영혼이 바스러지거나 종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다른 세계로 달려갈 뿐이다.
어딘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엄마는 먹기도 하고 노래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오늘 꾼 꿈은 신의 실수로 지구의 비밀을 뜻하지 않게 엿보게 된 일은 아닐까,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저 너머에 존재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죽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같은 거.
엄마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간절함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어딘가에 분명히 엄마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을 무의식 속에서 믿어버리게 만들었다. 반복적으로 꿈을 꾸는 이유, 나의 무의식에 이게 맞냐고 되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