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항상 출처를 알 수 없는 고유의 냄새가 있었다.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까지 할머니 집에 살 때나던, 나만의 냄새였다. 훗날 새롭게 지은 집에 들어가 살면서, 그리고 조금 더 커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냄새도, 냄새에 대한 기억도 잊혔다. 그러다 얼마 전에 나는 그 냄새를 다시 한번 맡았다. 고개를 숙일 때, 몸을 비틀 때 나의 몸에 남아 있는 냄새가 미처 나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해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 냄새를 맡았다. 친구들과 캠핑을 다녀와 불멍을 한 뒤였다.
어릴 적 할머니 집은 아궁에 불을 때 난방을 하던 그야말로 옛날 집이었다. 아궁이에 물을 끓여 찬물을 섞어 목욕을 하고 세수를 했다. 따뜻한 아랫목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른 나무를 끊임없이 태워야했다. 그러니 나의 몸에서는 항상 불 냄새가 났다. 캠핑을 몇 번 다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연기 냄새는 웬만해선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매일 같이 불과 함께 살아가던 나는 오죽했을까, 그을린 연기 냄새는 나의 양말 한 짝과, 머리카락, 팬티 한 조각까지도 빠짐없이 물들였다. 그때는 어디서 온 것인지 몰랐던 그 냄새의 출처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제는 씻으려고, 먹으려고, 따뜻하게 잠을 자려고 나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타는 것’을 보려고 나무를 태운다. 태운다는 행위의 목적부터 많이 달라졌지만 냄새는 여전했다. 여전히 나무가 거의 다 탔을 때, 불의 먹을 것이 거의 다 떨어졌을 때 그때의 연기가 가장 독했다.
지금도 쓰레기 차가 따로 들어오지 않는 우리 마을은 각자의 밭 혹은 논, 공터에서 소각하는 방식으로 쓰레기를 처리한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아빠는 수레에 쓰레기를 실어다가 ‘불 놓으러’ 간다. 쓰레기가 가벼운 날은 오토바이에 싣기도 한다. 활활 타는 불구경은 언제 보아도 재미가 있는 놀이다. 어릴 때는 아빠가 ‘불 놓으러’ 간다고 하면 신나서 따라 나섰다. 그리고는 온갖 생활 쓰레기가 활활 타는 연기를 온몸에 입어왔다.
이혼을 하고 엄마와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나와 동생을 데리고 할머니가 사는 집으로 들어왔던 아빠. 그러니까 나는 그때부터 불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나의 어린 날은 쓰레기를 먹이 삼아 큰 몸집으로 타던 불을 관람하는 것이 오락이었고 취미였다. 아궁이 아래 타는 불을 가만히 지켜보고 쪼그려 앉은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열기를 좋아했다. 가끔은 나의 삶의 일부를 소멸시켜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안 쓰는 노트 혹은 책 같은 것들을 아궁이에 넣어보기도 했다. 플라스틱 소재로 된 표지를 가진 다이어리는 검은 연기가 났다. 냄새도 고약했다. 혹시나 아빠가 나와서 ‘뭘 태웠길래 이렇게 냄새가 고약하냐’고 잔소리를 할까봐 마음을 졸이며 다이어리가 다 탈 때까지 아궁이 앞을 떠나지 못 한 날도 있었다. 무엇을 태우느냐에 따라 연기가 다르다는 것도, 종이를 태우면 재가 많이 날린다는 것도 모두 그때 배웠다.
나에게 불 냄새란, 엄마와 처음으로 떨어져 잠들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어린 날의 기억, 무언가 우리 가족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느꼈던 불안감, 소풍 날 엄마가 싸준 김밥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소망하던 기억, 빨아도 빨아도 사라지지 않는 매캐한 연기 같은 그리움. 이제는 씻기 위해, 따뜻하게 잠들기 위해 불을 피우지는 않는대도, 불 냄새는 여전히 불 냄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