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를 보고.
★★★★
현실로 범람하는 꿈의 행진.
아츠코의 꿈속 분신 파프리카는 묻는다. "아츠코가 내 분신이란 생각은 안 해봤어?" 현실의 내가 진실된 내면을 숨기고 있다면, 무의식의 투영인 꿈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일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억눌린 욕망의 위장된 표출이다. 무의식의 소망은 직설적으로 드러나면 자아가 불안을 느끼기에 꿈은 검열을 피해 이를 기괴하게 변형시킨다. 때문에 현실에서 의식 위로 떠오르지 못한 욕망은 꿈에서 과장되고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꿈에서 여러 인물이 섞이거나 상징물의 형태로 욕망이 은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극 중에서 이사장과 오사나이의 욕망은 기괴하게 뒤틀리고 과장된 형태로 표현된다. 휠체어에서 벗어나 걷고 싶다는 이사장의 욕망은 그를 시커먼 거인으로 만들었다. 그의 노욕은 아츠코를 범하고 싶다는 오사나이의 흑심과 뒤엉켜 샴쌍둥이처럼 돋아난다. 끝내 그들의 음욕은 폭주해 꿈(이 된 세계)을 집어삼키기에 이른다.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기에 우리는 인간이다. 자아의 검열은 다른 말로 사회성이다.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 도덕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발전시켰고 또 그런 방향으로 진화했다.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선까지만 허용된다. 도덕적 가치를 망가뜨리는 이들은 사회와 법이 단죄한다. 억눌린 욕망을 현실에서 배출한다면 우리가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꿈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고 또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자투성이 현실에게 꿈은 최적의 보완재다. 경감은 꿈속에서 (어릴 적) 꿈을 이룸으로써 현실의 PTSD를 치료한다. 아츠코는 줄곧 고압적으로 대하던 파프리카를 포용함으로써 자신에게도 따뜻한 내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꿈속의 악당을 처치함으로써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평화를 찾는다.
『파프리카』는 그야말로 꿈같은 작품이다. 『인셉션』과 같은 치밀한 플롯은 기대하지 말라. 히라사와 스스무의 몽환적 음악을 곁들인 초현실적 작화가 개연성을 부수며 범람한다. 꿈이라는 것이 원래 도중에는 말이 되다가도 깨고 보면 다 헛소리 아니겠는가.
p.s.
영화는 보지 않더라도 히라사와 스스무의 <Parade>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꿈 퍼레이드 시퀀스는 꼭 감상해 보기를 추천한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