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영웅이 돼라 신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를 보고.

by 영화보는 정씨
image.png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

세상을 짊어진 이는 어찌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가.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주역들은 모두 타인의 시선에 고통받는다. 신지는 아버지 겐도의 인정을 갈구하다 그것이 실패하자 아스카에게 집착한다. 미사토는 카지와의 관계에 매달린다. 아스카는 항상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타인의 온정을 멋대로 곡해한다. 겐도, 리츠코, 카지 등 조연들도 저마다의 비틀린 인간관계에 고통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작중 인물들의 개인적 결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실존적, 근원적 딜레마라는 사실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목적 없이 지구에 던져진 인간은 바로 그 목적성의 부재 덕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타인에게 나는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나의 모든 면모를 받아들이는 대신 눈에 들어오는 부분만을 가지고 판단하여 객체로 고정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나는 자유를 잃는다.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시선이야말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매개체다. 세상을 응시하는 눈은 자신만큼은 바라볼 수 없다. 그러니 타인의 부감하는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타인이 만들어낸 고통으로부터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받아야 하는 이 모순을 사르트르는 '지옥'이라 칭했다.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은 밀폐된 응접실에서 세 등장인물 가르생, 이네스, 에스텔이 벌이는 담화다. 거울이 없는 이 방에서 그들은 자신의 실존을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확인받아야 한다. 가르생은 자신이 비겁자가 아님을 증명받고자 한다. 그러나 이네스는 그를 믿지 않는다. 가르생은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잠긴 문을 두드리며 외친다.


"차라리 고문기구를 내놔라! 채찍질을 해라! 하지만 이 문만은 열어다오!"


그러나 어느 순간 정말로 문이 열리자 가르생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이네스는 그를 조롱하고 에스텔은 등을 떠밀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문을 닫고 뒷걸음질 친다. 그는 이네스의 인정을 구걸한다. 이네스가 그를 비겁자라 치부하는 한 그는 비겁자다. 그는 아네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방에 남는다.


이 근원적 딜레마는 『에반게리온』의 설정으로 은유된다. 릴리스의 자손인 인간은 아담의 행성인 지구에 불시착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도와는 다르게 인간은 반드시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마음의 벽, 즉 AT필드는 사도의 그것에 비해 너무나 미약하다. 사도는 강력한 AT필드 덕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AT필드 사이로 스미는 타인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끊임없이 에바에 타며 존재를 확인받는 신지는 가르생과 같다. 그가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견디면서까지 에바에 타는 것은 겐도의 인정을 구걸하기 위해서다. 끝내 그것을 구하지 못했을 때 그가 무너져 내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서드 임팩트를 일으킨다. AT필드가 무너져 모든 자아가 하나로 융합한다면 자신과 타인의 구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으니 타인에 의한 지옥도 없다. 자아가 섞인 탓에 내가 바라보는 나, 남이 바라보는 나,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남은 같아진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를 실존으로부터의 도피라 비난할 것이다. 그는 판단을 타인에게 맡기며 스스로를 객체화하는 이들을 비겁자라 불렀다. 그는 자기기만을 멈추고 스스로의 자유를 온전히 책임질 것을 촉구했다. 인간은 본질이 부재한 실존이 선사하는 자유와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주체적 존재로 우뚝 설 수 있다. 사르트르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이들을 <실존적 영웅>이라 치켜세웠다.


LCL의 바다에서 주변인들(의 혼합된 자아)과 처음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눈 신지는 타인의 시선이 주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작중 처음으로 주체적인 선택을 내려 영혼의 융합을 취소한다. 이 선택으로 그는 순간 실존적 영웅이 된다. 또한, 고통스럽지만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살아갈 의지가 있는 다른 실존적 영웅들도 언제든 LCL의 바다에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최초로 인간으로 복귀한 것이 언제나 타인의 인정을 갈구했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자아를 지닌 아스카였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그녀는 형체를 갖추자마자 타인에 의한 지옥으로 돌아왔음을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통감한다. 그러나 그 시선이야말로 자신의 실존을 긍정하는 유일한 매개체임을 이해한 그녀는 화해의 손길을 건넨다. (아직) 둘 뿐인 세상에서 자신이 존재하려면 아스카 역시 존재해야 함을 깨달은 신지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를 그만둔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가장 자신다운 한 마디를 남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