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를 보고.
박찬욱의 2009년작 『박쥐』는 아이러니의 영화다. 사람을 살리려 임상시험에 자원한 상현은 사람을 죽이는 흡혈귀가 되어 돌아온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을 살리는 권능이 있다고 믿는 신도들에게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그는 제 손으로 죽인 태주를 흡혈귀로 되살리며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한다. 살인으로 피를 취하는 태주와 다르게 자살 희망자들을 돕고 그들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가톨릭 교리상 자살은—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인 중 가장 나쁜 것'이므로 그의 죄는 태주의 죄보다 무겁다.
결말 직전까지 상현은 자신의 행동에 면죄부를 구한다. 원해서 흡혈귀가 된 것이 아니라며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자살자의 피만을 취한다. 처음으로 한 살인의 책임은 태주에게 씌운다. 지옥에 갈 것을 알면서도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 면죄부는 그 기원부터가 '천국에 갈 권리'를 교회가 판매하던 것, 천국을 믿지 않는 태주에게는 면죄부가 필요 없다. 그녀는 자신이 짐승임을 인정하고 쾌락적으로 살인을 벌인다.
원치 않게 얻은 흡혈의 저주는 성경의 원죄와 같다. 영화는 묻는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아담으로부터 전염된 죄를 우리는 속죄해야 하는가? 감독은 답을 내리는 대신 상현을 매개로 한 가지 메시지만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바닥까지 추락한 상현은 스스로 신도들의 믿음을 지워버린다. 태주와 함께 태양빛 아래에서 자살—최악의 살인—하며 인간으로서 참회한다. 인간으로 남는 것에는 믿음이 필요치 않다. 박찬욱 감독은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무신론자다. 어쩌면 이 작품은 가톨릭 교리에 대한 그의 도전일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인공호흡의 메타포이다. 입에서 입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인공호흡은 다른 이름으로 Kiss of Life(생명의 키스)라 불린다. 태주의 피를 마시며 동시에 자신의 피를 불어넣는 상현의 입맞춤은 가히 생명의 키스라 할 수 있다. 극 중에서 흡혈과 성관계가 사실상 동일시되는 탓에 상현이 태주의 시체와 입을 맞추며 피를 교환하는 장면은 네크로필리아를 연상시킨다.
모든 아이러니는 영화의 제목인 '박쥐'로 요약된다.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역시 흡혈의 메타포일 테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세와 중력이다. 거꾸로 매달린 박쥐는 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추락해야 한다. 상현이 처음 흡혈귀의 괴력으로 도약하는 장면을 직부감으로 촬영해 추락처럼 보이도록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끝을 모르고 하강하던 상현은 마지막 순간 인간으로 바로 선다. 흡혈, 추락, 역천 등 산재한 모티프를 단숨에 함축하는 단어 선택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문제적인 주제의식을 청결—다른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한 미장센으로 연출하는 것은 박찬욱만의 특기다. 그의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은 내용과 형식의 괴리에서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낀다. 『박쥐』는 그런 면에서 극에 달한 작품이다. 아이러니와 메타포를 치밀하게 직조해 완성한 이 그로테스크한 걸작에 만점을 매기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