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여, 감독을 죽여라 (2)

롤랑 바르트와 저자의 죽음

by 영화보는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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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가주의적 비평은 그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전통적 작가주의적 비평가들은 작품에서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가?", "감독의 삶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감독은 어떤 사람인가?" 따위의 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한다. 작가, 즉 감독의 의도를 찾는 비평은 분명 훌륭한 감상법이지만, 가끔 작가주의에 매몰되어 도리어 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작품은 없다. 오직 작가뿐이다."


라는 장 지로두의 말처럼, 작가주의적 비평에 심취한 이들은 '감독의 의도와 철학'이라는 감옥에 갇혀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을 음미하지 못한다. 그들은 작품을 비평의 깔때기에 쑤셔 넣고는 감독의 의도라는 가느다란 줄기만 취한다.


작가주의적 시각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많은 작품들은 너무도 간단하게 요약된다. 평화주의, 반전주의, 생태주의, 강인한 여성 서사. 이는 장장 40년에 달하는 그의 작품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단순한 키워드로 환원하는 것은 작품마다의 개성을 말살하는 행위이다. 의도 찾기에 몰두하느라 오무의 코즈믹 호러, 라퓨타의 스팀펑크 디자인, 수채화로 그린 듯 한 포뇨의 바다를 놓치는 것은 아쉽지 않은가.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에세이 <저자의 죽음>을 통해 작가주의적 비평에서 탈피할 것을 주문한다. 전통적 작가관인 <저자>는 작품을 통제하는 신적인 존재이다. 그는 글보다 먼저 존재하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나 사상, 감정 등을 작품에 투영한다. 그는 텍스트의 주인이며, 읽는 이에게는 그의 의도가 곧 정답이다. 다른 해석의 여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저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에게 작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조물주가 아니다. 작가는 그저 역사가 축조한 언어라는 시스템 속에서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할 뿐이다. 그는 이 새로운 작가관을 <각본가>라 칭한다. 각본가는 집필 중에만 존재하는 일종의 대행자이며,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소멸한다. 각본가가 떠남으로써 작품은 누구에게도 속박받지 않은 독립적 세계로 존재하게 된다.


저자의 구속에서 해방된 세계에는 독자의 해석에 어떠한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없이 많은 자유로운 비평이 가능하다. 저자의 죽음으로부터 독자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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