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을 보고
★★★★☆
지도를 벗어난 세상에서 발견한 언어를 초월한 위로.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 말한다. 『컨택트』에서 주인공 루이즈가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자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변하였듯, 언어를 배움으로써 인식의 지평은 확장된다. 소음과 다름없던 말소리가 의미를 지닌 대화로, 얼룩이나 다름없던 활자가 뜻을 품은 문장으로 우화한다. 타국의 문화, 유머, 예절 등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에 입장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란 미지의 세상을 여는 열쇠이자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여행과 나날』의 미야케 쇼 감독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에 반항해 본다. 주인공 '이'(심은경 분)는 일본에서 각본가로 활동하는 한국인이다. 각본가로서 세상(현실이든, 상상이든)을 활자로 표현해야 하는 운명인 주인공은 언어의 제약에 답답함을 느낀다. 백지상태로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일본어를 배운 지금은 도리어 언어의 한계에 갇혀 직관을 잃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각본을 맡은 영화의 GV에서 "나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해버리는 지경에 이른 주인공은 스승의 조언에 따라 여행을 떠난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도착한 설국. 호텔이 전부 만실이었던 탓에 주인공은 지도에도 없는 여관으로 피신한다. 설산 위 여관에서 언어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낯을 가리는 주인공과 퉁명스러운 주인장 '벤조' 사이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벤조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 그녀는 혼자 빈둥거리거나 이따금씩 스승의 유품인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뿐이다. 주인장은 '여관을 소재로 각본을 써보라' 제안하지만 정작 여관에 대해 묻는 주인공에게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결국 주인공은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며 사과한다.
언어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은 지도를 그리는 것과 같다. 지도가 있으면 효율적으로 길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대가로 4D의 세상을 2차원의 울타리에 가둬야 한다. 무한과 연속의 세상을 유한한 단어로 이루어진 언어에 사영하는 행위는 축약과 은유에 의존한다. 정보의 손실은 필연적이며, 변환은 비가역적이다. 지도만 보고 세상을 그릴 수 없듯, 말로 된 설명만으로는 원본인 현실을 복원할 수 없다. 니체가 <언어에 의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그 탓이다.
언어의 지도 밖으로 도망친 여행에는 특별한 성과가 없었다. 주인공은 오밤중에 벤조와 함께 '잉어 서리'에 나선다. 구워 먹을 거냐는 질문에 벤조는 키워서 팔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양동이를 열어보니 잉어는 이미 얼어 죽었다. 그녀는 "몇백만 엔짜리 잉어, 맛이나 봐보자"며 농담하지만 맛은 없었는지 한 입 뜯어 먹힌 잉어는 밤새 화로에 방치되어 새까맣게 타버린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지만, 벤조와 아는 사이였던지라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잉어는 다행히 들키지 않는다). 경찰이 감기에 걸린 벤조를 병원으로 데려간 탓에 주인공은 작별인사도 못하고 여관을 떠난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삶의 의미를 부르짖어봤자 답해주지 않는 세상, 헛짓거리나 하고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며 킬킬대는 것이 차라리 행복할 테다. 눈밭에서 허우적대며 여관을 나서는 주인공의 걸음걸이는 왜인지 가벼워 보인다.
『여행과 나날』은 주제의식에 충실한 작품이다. 미야케 쇼 감독은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대신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고즈시마무라의 여름과 야마가타현의 겨울을 렌즈에 담는다. 굳이 분석하며 보지 않아도 좋다. 캡처해서 배경화면 삼고 싶은 영상미, 시종일관 미소 짓게 만드는 귀여운 유머, '느좋'이란 단어의 의인화 같은 나기사(카와이 유미 분)만으로도 티켓값은 충분하다. 어쩌면 이 작품을 글로 표현하려는 시도 역시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