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이 되어 철든 쉰둥이-
“아야! 비행기 시간 늦겠다. 어여 가!”
“저 진짜 가요?”
“이제 괜찮아. 언니들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렴.”
엄마는 아빠 나이 쉰 살이던 해 늦가을에 나를 보셨다. 이런 나를 ‘쉰둥이!’라고 불렀고, 언니 넷과 오빠 둘을 둔 천덕꾸러기 막내딸로 자라났다. 깡마른 몸에 느는 뱃살을 나잇살이라고 생각하셨고, 5개월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임신 사실을 아셨다. 그 사실이 남사스러워 산모가 위험하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를 없애려고 예약까지 잡아 놓으셨다. 하지만 아빠의 재치로 예약 당일 산부인과에 가지 못하셨고, 그렇게 무사히 세상 빛을 볼 수 있었다. 가끔 영웅담처럼 자랑하는 아빠를 보며 가슴을 치셨다.
아빠의 쉰둥이 사랑은 참으로 대단하셨다. 한번은 동네 사내아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깡이 센 나는 그 아이를 흠씬 두들겨 패 주었고, 그럴 때마다 잘했다며 100원을 주셨다. 그 뒤부터 동전을 받기 위해 이유 없이 사내아이를 때렸다. 어린 시절, ‘여존남비’가 나도 모르게 스며들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선머슴 같더니, 대학에 와서도 여자다워지기는커녕 몰래 가방을 꾸려 겁도 없이 혼자 ‘오지’로 떠났다. 엄마는 이런 나를 보며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냐며 시집을 못 가면 모두 아빠 탓이라고 하셨다.
그에 반해 엄마는 나의 모든 행동을 일거수일투족 참견하셨다. 걱정스러운 마음이라지만 유독 여행을 심하게 반대하셔서 몇 번이나 집을 뛰쳐나갔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돌아와 집에 기생했다. 그러기를 몇 번,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고 나의 오랜 염원인 독립된 삶을 이루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나에 대한 걱정과 애착을 내려놓으려고 역술가를 찾으셨다.
“이 딸은 한국에 있으면 병이 날 사주네요. 차라리 외국으로 여행을 보내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말한 그 한마디를 평생 주문처럼 여기며 막내딸이 여행 갈 때마다 무사할 거라고 되뇌셨다.
2006년 여름, 러시아를 여행하기로 했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로 들어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호수 ‘바이칼’을 보기로 했다. 또 도시가 통째로 유네스코에 지정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나 유럽의 관문 ‘발트 3국’을 밟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모스크바’에 와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한 달 가득한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인천공항과 지척인 본가에 도착했다. 출국 시간이 늦은 오후라 엄마와 함께 오전 나절을 보낼 셈이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한참 지나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왜 이리 문을 늦게 열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 내가 좀 이상하네. 초인종이 울린 지도 몰랐어.”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는 갑자기 구토 증상을 보이더니 쓰러지셨다.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엄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119를 불렀고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대학병원 응급실에 와 있었다. 원인은 저혈당 쇼크였다. 항상 강하다고만 여겼던 엄마의 깊은 주름과 메마른 몸은 영락없이 78세 노인이었고, 이날 엄마는 사경을 헤매셨다.
소식을 듣고 언니, 오빠들이 하나둘씩 병원으로 찾아왔고, 그 사이 엄마의 증세는 호전되어 자식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의식이 돌아오셨다. 막 도착한 둘째 언니를 보고 말씀하셨다. “아야! 막내가 아직 아침을 못 먹었다. 좀 챙겨줘라.” 서른네 살인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언니에게 당부하셨다. 누가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지만 언니들은 관성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마지못해 아침을 먹고 온 사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넷째 언니도 보였다. “오후에 러시아로 떠나니? 엄마가 비행기 시간 늦지 않게 보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
그날 러시아 여행은 못 간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손사래를 치며 등을 떠미셨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지만, 하늘로 날아오를수록 이상하게 걱정과 근심이 구름처럼 흩어져 갔다. 미지의 땅, 러시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디찬 바이칼 호수에 발을 담그면서 파란 하늘과 푸른 물빛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백야를 누리며 명소를 찾아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돌아다녔다.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더 좋아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여태 안부를 묻지 않았다. ‘엄마는 강하니까 지금쯤 퇴원하셨을 거야.’
두 주의 시간이 흐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한 무리의 한국 학생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내게 ‘피시방’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요즘처럼 구글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시가지라 위치를 설명한다고 찾을 턱이 없었다. 피시방은 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는데 나 역시 다른 여행에서는 저녁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메일을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나의 두 다리는 벌써 그들을 피시방으로 안내했고, 의자에 앉아서는 메일함을 자연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애써 외면했던 문자들이 머릿속에 한 자 한 자 파고들었다.
“엄마가 다시 의식을 잃어 응급실에 계시니, 한국으로 빨리 돌아오라.”
다음날 떨리는 손으로 ‘발트 3국’을 가려고 예매했던 열차표를 바꾸어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 뒤로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한 날, 다행히 엄마는 건강을 되찾았고 밝은 얼굴로 맞아주셨다. “괜찮은데 왜 벌써 왔어? 나 때문에 제대로 구경도 못 했겠구나!” 하시며 맘 편히 여행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하지만 내가 여행하는 동안, 뇌졸중 증세가 보여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셨고, 혹여 나를 못 보고 떠나실까 싶어 애타게 찾으셨다고 했다.
결혼해서도 ‘여행병’을 못 버려 오지 여행을 떠날 때, 위험하다며 말리는 이 씨를 설득한 것도 엄마였다. “자네가 이해하게나. 저 애는 여행을 못 가면 병이 나는 애야.” 처음에는 장모의 이런 말씀이 섭섭하고 서운했지만, 어느 순간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했다. “자기는 철없는 쉰둥이야.”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철없는 쉰둥이?
어느새 나는 아빠가 나를 보신 나이인 쉰 살이 되었다. 이제야 겨우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세상 속의 자신을 마주 보았다. 나의 걱정에 몇 마디 건네면 잔소리라고, 위험한 나라에 못 가게 하면 간섭한다며 모질게 말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다. 여행 중에 잘 있다는 안부 전화 한 번 안 한 것이 너무나 죄송스럽다. ‘나무는 고요하려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효도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고 했던가? 자신밖에 모르던 철부지가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서야 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더 흘러서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는 엄마의 ‘철든 쉰둥이’가 되리라.
-2006년 러시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