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덟

단편

by 여더리

나도 엄마가 있다.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이름을 지어놓곤 졸도했다. 출산 당시 분만실에 걸려있던 디지털시계는 8시 5분. 엄마는 탄생의 순간에 허리를 꺾었고, 순간 마주친 뻘건 숫자는 애석하게도 2:8이었다.


엄마는 야구를 좋아했다.

한화팬은 보살이라던, 엄마는 과연 보살이었다. 1997년 8개 팀 중 7위에 그쳐 만년꼴찌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할 때에도, 약 12년 전 엄마 한창일 때는 정규 시즌 1위도 했었다며(한국시리즈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당시는 해태 타이거즈였던 기아의 해태 DNA) 그리도 1위를 바라던 엄마. 2025년, 한화는 5연승을 거쳐 역대 최다 연승, 마침내 준우승을 이뤄냈지만, 엄마는 야구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아빠는 엄마의 출산현장에 없었고, 치열한 승부의 세계는 작명의 영감에 그쳤다. 그렇게 나는 '이여덟'이 되었다. 성이 '이'씨 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2와 8을 더한 외자-십-이 될 뻔했다. -십-은 어감이 좋지 않다.

강-십. 최-십. 영 좋지 않다.


어린이 때에는 여덟을 발음하기에 적합지 않은 구강구조였기에 내 소개는 항상 엄마의 부연설명이 필수였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여더리로 불렸고, 초등학교 문법시간에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저는 이여덜빕니다."

내 이름을 발음하는 방법이다. 나는 여더리에서 자라나 여비가 되었다.


가끔은 이빨 등으로도 불렸지만 그중 맘에 드는 별명은 없었다. 과연, -십-으로 불렸다면 따라다녔을 별명들이 아찔하다. 나도 한 때는 유미, 세림 등 예쁜 이름을 갖고 싶었다. 여덟은 너무 직관적이며 생소했다. 엄마도 이름이 숫자는 아니었지 않은가. 그럼에도 참 엄마다운 작명센스였다.


구름이 내린 여덟 방울에서 잉태되었다는 엄마의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이여덟이란 이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좋은 탄생설화를 만들어 나를 속인 것이다. 덕분에 나는 쑥과 마늘에 비할 바 없는 엄청난 탄생의 비밀 속에 자라났다. 엄마는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길 좋아했다. 기억을 복기해 보면, 어린 시절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대부분 동화에도 없는 엄마의 순수창작물이었다. 문학을 좋아했던 엄마.


엄마는 보살이었다.

아홉 남매 중 막둥이였던 엄마는 뺏고 빼앗기는 혈투 속에 양보와 배려를 배웠고, 오빠만 여덟이라는 치명적인 리스크를 안고 자랐다. 시가 좋아 국어국문학과를 진학하고 싶어 했던 엄마는(문예창작이 더 시와 가깝겠지만) 갓 19살에 위로 네 오빠를 건사하느라 은행에 취직했다. 넷째 오빠부터 여덟째 오빠는 엄마보다 각각 4, 3, 2, 1살이 많아 대학진학을 요구했으며 또 외할머니는 그를 수용했다. 엄마도 그를 수용한 듯 보였다. 표면적으로는.


엄마는 보령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내항동을 벗어나 명천동, 동대동을 전전하며 결국 대천동에 자리 잡았다. 97년도 나를 임신하고서는 다니던 은행에서 자연스레 퇴직당한 후, 수영장, 동네 책방을 전전한 엄마는 대천동의 아파트 관리사무소 일자리를 구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엄마가 부끄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그맘때부터 엄마는 외할머니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천동 집에서 엄마가 일하던 아파트가 보였는데, 당시 15층이라는 고층 아파트임에도 관리사무소는 열악함 그 자체였다. 몇 번 프린트를 부탁하러 들른 관리사무소는 엄마와 두 명의 남자가 일하고 있었고, 지하주차장 관리사무소 문을 열면 엄마 책상이 먼저 보였다. 엄마는 가끔 무화과나무 밑, 1층 실외기 바람을 비 맞듯 맞고 있었다. 지하 관리사무소에서 에어컨을 틀면 30분은 기다려야 시원해지던 세평 방에서 뭐가 그리 갑갑했던지, 엄마는 출근 후 1시간은 실외기 앞에 서있었다. 가끔은 방학에도 일찍 일어나 엄마의 출근을 배웅하고 나서 엄마의 출근길을 지켜보다가, 실외기 앞에 서있는 엄마를 구경했다.


엄마가 달라진 것은 2022년쯤이었을 거다. 그때 엄마는 일하던 관리사무소에서 나왔다. 야간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일과 병행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그만 둘 정도로 꿈에 대한 의지가 강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엄마는 안 마시던 술을 시작했고, 논문을 읽는다며 다양한 논문 검색 사이트를 물었다. 엄마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자전적인 시인지 그와 딴판의 시인지는 모른다. 엄마가 보여준 적 없으니. 어릴 적 듣던 동화 같던 이야기들이 아님은 확실했다. 엄마의 표정은 날로 어두워졌고, 자신이 당한 불합리에 대해 주정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콩나물국이나 북엇국에 계란 후라이를 꼭 넣어먹는다. 어릴 적 계란 후라이를 먹어본 기억이 손에 꼽아, 그 결핍 때문에 꼭 계란 후라이를 넣어 먹는다고 했다. 그 많던 계란 후라이가 누구 뱃속에 들어갔는지는 자명하다. 소주 반주를 하며 먹는 콩나물국에 빠진 계란후라이. 엄마는 더 이상 티비를 틀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있기 위해 콩나물국과 소주를 마시며 눈에 빛을 잃어갔다.


나는 엄마가 시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점점 피폐해져가는 모습이 보기 힘들었다. 시를 잘 모르지만, 유명한 작가들은 요절했다는 둥 그런 소리를 들으니 더 거북했다. 창작의 고통인지, 인생에 대한 반추 때문인지. 엄마는 갈수록 야위었고 말을 아꼈다. 내가 있을 때 하는 술주정은 후회와 증오뿐이었다. 곧 연락을 끊은 외삼촌들은 물론이고 외할머니까지 외면하는 엄마를 보며, 혼자 계신 외할머니를 케어하는 것은 손주인 내 몫이었다.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기 전, 외할아버지가 만들어두고 돌아가신 반쪽짜리 침대에서 떨어지셨다. 외할머니는 내게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전화했고, 나는 119대신 엄마에게 전화했다. 근무 중이니까 엄마가 얼른 가서 봐달라 말을 전했는데, 엄마는 알았다며 가지 않았다. 애초에 세 번은 받지도 않았었다. 야간대학을 다니며 오전은 시간이 넉넉했음에도. 나는 엄마에게 여덟 번을 전화했고, 외할머니가 두 시간을 고통에 신음한 이후에야 119의 존재를 각해냈다.


엄마는 팔삭둥이였다. 심지어 뱃속에서 선 아이라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다리부터 나오는 상황에서 외할머니는 이미 숙달된 출산의 달인인 상태였고 얼마 걸리지 않아 머리까지 낳아버렸다. 오빠들을 위해 희생할 어린양을 말이다. 계란후라이를 다 처먹던 그 사람들은 지금 소방관, 경찰관, 세무사가 되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보령을 떠난 그 여덟 명은 모두 삶에서 보령을 지운 듯하다.


충남 보령, 작은 동네에서 조개를 캐 시장에 팔던 외할머니는 해안도로가 지나가는 내항동에서 대천동 시내까지 걸어 다니시며 9남매를 키워냈다. 열여덟, 당시엔 적지 않은 나이에 출산을 시작한 외할머니는 보령 토박이가 아니었다. 열여덟에 가진 아이의 탄생을 필두로 스물일곱까지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고, 외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탄소가 다 빠진 뼈와 가늘어진 모발뿐이었다. 가끔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면 밀물과 썰물이 달의 움직임 때문이란 것을 알고선 놀라워하던 외할머니. 그저 임신만이 삶의 목표는 아니었을 외할머니.


외할머니 댁에는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장정 두 명이 둘러매도 손바닥만큼 남는 커다란 무화과나무. 7월, 여름이 시작되면 외가댁 고추밭에 일손을 도우러 가며 그 나무를 보곤 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으로 줘서 악취에 둘러싸여 있는 무화과나무. 나무 앞 큰 돌은 무화과를 따기 위한 받침돌이다. 외할아버지가 어디선가 주워온 커다란 비석. 한자만 쓰면 묘비로 써도 될 정도로 한 면이 반짝이는 큰 돌. 엄마는 무화과나무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이유는 별 거 없다. 외할머니가 엄마 당신보다 무화과나무와 더 애틋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2024년 8월, 그러니까 작년 여름에 결국 사달이 났다. 엄마가 외할머니의 무화과나무를 꺾어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사실 갉아버렸다. 엄마는 늘어진 손으로 생에 첫 전기톱을 잡았다. 처음에는 위잉 울리는 소음에 내항동 주민이 다 나와 쳐다보는 듯했는지 벌건 뒷목을 갖고도 겨우 생채기만 냈지만, 곧 엄마는 무언가에 휩싸였고 그 무언가는 엄마가 온몸을 흔들어가며 톱질을 하게 만들었다. 땀이 원체 없는 엄마의 등이 젖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손바닥도 땀이 흥건해 전기톱을 여러 번 놓칠 뻔도 했다. 목장갑도 없이 그것도 맨손으로 갉아낸 나무는 반쯤 잘라졌고, 이미 생명력을 잃은 나무를 엄마는 발로 연신 차버렸다. 꿀물 울컥울컥 차있는 무화과가 둥둥 떨어졌고, 주워 먹을 수도 없이 음식물 쓰레기 거름 위에서 터졌다.


온전히 내 부담이 된 외할머니와의 산책 중, 느이 할머니네 딸래미가 집 다 박살내고 있다는 이웃의 연락을 받았다. 과연 내항동 집에는 무화과나무 밑동과 그 위에 앉아 숨을 고르는 엄마가 있었다. 악취 나는 비석위에 발을 올려두고는. 엄마가 줄곧 고집했던 단발은 땀에 뭉쳐 올백머리에 가까웠고, 오랜만에 마주한 엄마의 눈썹은 기억 속 그때보다 꽤 짙었다. 그 감상은 외할머니를 잡은 오른손이 떨림에 곧 멎었다. 외할머니는 손에 검버섯이 흔들릴 정도로 온몸을 떨어댔고, 정신이 돌아온 나는 외할머니를 차에 실었다. 외할머니와 말 한마디 없이 요양원에 도착했고, 눈치 없는 요양보호사는 바깥바람 쐐시니 어떠셨냐고 눈웃음치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나는 경황없이 다시 엄마에게 질주했다.


엄마는 시인지 무엇인지를 남겨두고 사라져 있었다. 새로 든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왜 내게 이토록 큰 시련을 주는 것인지. 엄마는 무슨 지옥 속에 있는지.


눈길에 격발한 세 길이 굽이 흐르고

한 갈래 꺾인 차례를 우린 사랑이라 부르매

그대 가른 물줄기 여섯 송이

하등 괴로움 없나이다_오화선


꽃과 같이 착하게 자라라 지은 엄마의 이름은 결국 꽃도 피우지 못했고, 착하지도 못한 영 모순이었다. 어쩜 그리도 무화과나무와 닮아있는지. 나는 무화과나무를 쥐어들었다. 고작 숫자뿐인 8에 얽힌 슬픈 이야기들을 가득 끌어안고 나는 결국 이여덟이다. 꺾인 무화과나무를 쥐어든.



장편은 여기)) https://brunch.co.kr/@ryurerim/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