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덟_1
나도 엄마가 있다.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이름을 지어놓곤 졸도했다. 출산 당시 분만실에 걸려있던 디지털 시계는 8시 5분. 엄마는 탄생의 순간에 허리를 꺾었고, 순간 마주친 뻘건 숫자는 애석하게도 2:8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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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이시네요. 딸"
엄마는 딸, 아들을 가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아득한 '딸'이라는 단어에 사라졌다 믿었던 사랑이 못내 다시 꿈틀댔다.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작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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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야구를 틀어. 다른 거 보자 엄마"
"너 야구를 잘 몰라서 그래. 진짜 재밌을 때는 진짜 재밌어. 엄마 한창 때는 정규 시즌 1위도 했었어"
"정규 시즌이 뭔데"
"그 때는 1등팀 해태랑 붙어서 한국시리즈도 준우승하고 막 그랬어"
"해태는 또 뭐야"
퇴근하고 저녁시간이 되면 엄마는 항상 야구경기를 틀어놓고 밥을 먹었다. 한화경기를 보는 것은 뭐 이해한다만, 한화가 경기할 때도 아닌데 남들이 싸우는 야구경기를 보는 것은 이해가 안됐다. 무슨 팀이 올라오는지 봐야한다나 뭐라나.
1987년, 정규 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한 빙그레는 내가 태어나던 1997년 8개 팀 중 7위에 그쳐 만년꼴찌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후로도 계속되는 내리막 속 치열한 승부의 세계는 엄마에게 작명의 영감에 그쳤다. 2:8. 97년도 해태가 1위하던 시절, 빙그레는 최하위였고 엄마는 그것이 안타까워 해태2:빙그레8을 소원했고, 나는 '이여덟'이 되었다. 성이 '이'씨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2와 8을 더한 외자 -십-이 될 뻔 했다. -십-은 어감이 좋지않다.
강-십. 최-십. 영 좋지 않다.
어린이 때에는 여덟을 발음하기에 적합치 않은 구강구조였기에 내 소개는 항상 엄마의 부연설명이 필수였다.
"네가 시현이니? 여덟이가 시현이 많이 좋아하더라. 싸우지 말고 잘 놀아? 여덟은 숫자 8이야."
"너는 혜선이지. 예절바른 반에서 공부 제일로 잘한다며. 우리 여덟이랑 잘 지내줘? 그럼 여덟도 읽을 수 있겠다. 혜선이는."
아무리 엄마가 여덟, 여덟 염불을 외어도 아이들은 '여더리'가 최선이었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여더리로 불렸고 나도 여더리라는 자아를 가졌다. 내 소개를 엄마가 대신해주니 그것을 당연하다 여긴. 나는 여더리.
유년기를 지나 초등학생이 되자 스스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날을 맞이했다. 엄마는 우리 반에 못 들어오니까.
"저는 이여더립니다."
당시 1학년 4반 담임선생님은 국어선생님이셨고, 내 자기소개가 불편하셨는지 내 어깨에 손을 살풋 얹으셨다.
"우리 여더리는 '여덟'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요. 친구들이 여덟이를 부를 때는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바로바로 '여덜비'랍니다."
자기소개 외에 수업시간에도 내 이름은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저는 이여덜빕니다."
내 이름을 발음하는 방법이다. 나는 여더리에서 자라나 여덜비가 되었다. 자연히 여더리 자아는 사라지고 있었다. 엄마의 부연설명이 더이상 필요치않았으므로.
와중에 으레 아이들이 그러하듯, 이름갖고 별명짓는 것이 흔했는데 역시 그 또한 짖궂게 부르는 것이 태반이었다. 내 이름은 이빨, 십팔, 이시팔 등 여덟을 팔로 발음하는 경향을 가졌는데, 그 중 마음에 드는 별명은 없었다. 과연 -십-으로 불렸다면 따라다녔을 별명들이 아찔하다.
나도 한 때는 화림, 세경 등 예쁜 이름을 갖고 싶었다. 여덟은 너무 직관적이며 생소했다. 엄마도 이름이 숫자는 아니었지 않은가. 그럼에도 참 엄마다운 작명센스였다.
"너는 구름에서 나린 여덟 방울로 잉태된거야."
이맘때쯤 엄마의 말은 순 거짓말들이었다. 이여덟이란 이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좋은 탄생설화를 만들어내 나를 속인 것이다. 아빠없는 아이라고 무시당할까봐 쑥과 마늘에 비할 바 없는 탄생의 비밀을 만들어 주고는 아빠의 존재를 지워냈다.
"아빠는 없어도 돼. 여덟이는 구름이 선물한 아이니까."
엄마는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길 좋아했다. 남색의 독수리가 나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었는데, 그건 한화의 영향이지싶다. 당시 빙그레였던. 그래서 떠오르지않는 엄마의 이야기들이 아쉽기도 하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당시 엄마의 상상 속 이야기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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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팬들이 보살이라는데 역시나 엄마도 보살이었다.
아홉 남매 중 막둥이였던 엄마는 뺏고 빼앗기는 혈투 속에 양보와 배려를 배웠고, 오빠만 여덟이라는 치명적인 리스크를 안고 자랐다. 시가 좋아 국어국문학과를 진학하고 싶어했던 엄마는(문예창작이 더 시와 가깝겠지만) 갓 19살에 위로 네 오빠를 건사하느라 은행에 취직했다. 넷째 오빠부터 일곱째 오빠는 엄마보다 각각 4, 3, 2, 1살이 많아 대학진학을 요구했으며 또 외할머니는 그를 수용했다. 엄마도 그를 수용한 듯 보였다. 표면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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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보령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장장 10명의 가족과 함께 살았던 내항동을 벗어나 명천동, 동대동을 전전하며 결국 해안도로 시작점과 종료점으로 크게 나뉜 대천동에 자리잡았다. 97년도 나를 임신하고서는 다니던 은행에서 자연스레 퇴직당한 후, 수영장, 동네 책방을 전전한 엄마는 대천동의 아파트 관리사무소 일자리를 구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엄마가 부끄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대천동 구시(舊 시내)에서 놀다 엄마 일하는 관리사무소에 친구를 자주 데려가 인사시켰으니까. 한여름 겨드랑이 땀이 교복 와이셔츠 허리까지 적셔도 엄마에게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나를 반겼고 내가 오는 걸 오히려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대천동 집에서 엄마가 일하던 아파트가 보였는데, 당시 15층이라는 고층 아파트임에도 관리사무소는 열악함 그 자체였다. 몇 번 학교 숙제때문에 프린트를 부탁하러 들른 관리사무소는 엄마와 두 명의 남자가 일하고 있었고, 지하주차장 관리사무소 문을 열면 엄마 책상이 먼저 보였다. 아무래도 여자인 엄마가 사람을 사글사글하게 맞이해야 하니까. 문열면 엄마가 먼저 보여서 나는 좋았다. 엄마는 내가 문을 열면 이미 웃고있었다. 그래서 나도 웃으며 문을 열었다.
관리사무소에서 근 8년을 일한 후였을 즈음에, 엄마는 이상한 루틴을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지하 관리사무소 에어컨과 연결된 1층 실외기 앞에 자주 서있던 것이다. 그늘지라고 심어둔 큰 무화과 나뭇잎에 가려져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거의 1시간 가량을 서서 실외기 바람을 비맞듯 맞고있었다. 나는 가끔 방학에도 일찍 일어나 엄마의 출근을 배웅하고, 엄마의 출근길을 지켜보다가 기어코 실외기 앞에 서있는 엄마를 구경했다.
엄마가 크게 달라진 것은 2022년 쯤이었을 거다. 그 때 엄마는 관리사무소를 그만뒀다. 야간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일과 병행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그만 둘 정도로 꿈에 대한 의지가 강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엄마는 안마시던 술을 시작했고, 논문을 읽는다며 다양한 논문 검색 사이트를 물었다. 엄마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자전적인 시인지 그와 딴판의 시인지는 모른다. 엄마가 보여준 적 없으니. 어릴 적 듣던 동화같던 이야기들이 아님은 확실했다. 엄마의 표정은 날로 어두워졌고, 자신이 당한 불합리에 대해 주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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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계란 후라이 두 개 넣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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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콩나물국이나 북엇국에 계란 후라이를 꼭 넣어먹는다. 어릴 적 계란 후라이를 먹어본 기억이 손에 꼽아, 그 결핍때문에 꼭 계란 후라이를 넣어 먹는다고 했다. 그 많던 계란 후라이가 누구 뱃속에 들어갔는지는 자명하다. 소주 반주를 하며 먹는 콩나물국에 빠진 계란후라이. 엄마는 더이상 티비를 틀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있기위해 콩나물국과 소주를 마시며 눈에 빛을 잃어갔다.
나는 엄마가 시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피폐해져가는 모습이 보기 힘들었다. 시를 잘 모르지만, 유명한 작가들은 요절했다는둥 그런 소리를 들으니 더 거북했다. 창작의 고통인지, 인생에 대한 반추때문인지. 엄마는 갈수록 야위었고 말을 아꼈다. 내가 있을 때 하는 주정은 후회와 증오뿐이었다. 그 대상은 엄마가 먹여키운 오빠들과 그를 묵인한 외할머니였다. 곧이어 연락을 끊은 외삼촌들은 물론이고 외할머니까지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혼자 계신 외할머니를 케어하는 것은 손주인 내 몫이었다.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기 전, 외할아버지가 만들어두고 돌아가신 반쪽짜리 침대에서 떨어지셨다. 외할머니는 내게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전화했고, 나는 119대신 엄마에게 전화했다. 근무 중이니까 엄마가 얼른 가서 봐달라 말을 전했는데, 엄마는 알았다며 가지않았다. 애초에 세 번은 받지도 않았었다. 야간대학을 다니며 오전은 시간이 넉넉했음에도. 나는 엄마에게 여덟번을 전화했고, 외할머니가 두 시간을 고통에 신음한 이후에야 119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엄마는 팔삭둥이였다. 심지어 뱃속에서 선 아이라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다리부터 나오는 상황에서 외할머니는 이미 숙달된 출산의 달인인 상태였고 얼마 걸리지않아 머리까지 낳아버렸다. 오빠들을 위해 희생할 어린 양을 말이다. 계란후라이를 다 처먹던 그 사람들은 지금 소방관, 경찰관, 세무사가 되어 요직을 차지하고있다. 보령을 떠난 그 여덟명은 모두 삶에서 보령을 지운듯 하다.
충남 보령, 작은 동네에서 조개를 캐 시장좌판에서 팔던 외할머니는 해안도로가 지나가는 내항동에서 대천동 시내까지 걸어다니시며 9남매를 키워냈다. 열여덟, 당시엔 적지않은 나이에 출산을 시작한 외할머니는 보령 토박이가 아니었다. 열여덟에 가진 아이의 탄생을 필두로 스물일곱까지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고, 외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탄소가 다 빠진 뼈와 가늘어진 모발 뿐이었다. 가끔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조용히 복기하던 할머니.
"할머니, 저거 바다가 물러나는게 달때문이래요. 들어오는 것도 그렇구요."
"몰라. 몰라. 나는 글도 모르는데 뭘."
"...달때문에...달..."
그저 임신만이 삶의 목표는 아니었을 외할머니.
외할머니 댁에는 커다란 무화과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장정 두명이 둘러매도 손바닥 만큼 남는 커다란 무화과 나무. 7월, 여름이 시작되면 외갓댁 고추밭에 일손을 도우러 가 그 나무를 보곤 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으로 줘서 악취에 둘러쌓여있는 무화과 나무. 나무 앞 큰 돌은 무화과를 따기 위한 받침돌이다. 외할아버지가 어디선가 주워온 커다란 비석. 한자만 쓰면 묘비로 써도 될 정도로 한 면이 반짝이는 큰 돌. 엄마는 무화과 나무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이유는 별 거 없다. 외할머니가 엄마 당신보다 무화과 나무와 더 애틋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2024년 8월, 그러니까 작년 여름에 결국 사달이 났다. 엄마가 외할머니의 무화과 나무를 꺾어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사실 갉아버렸다. 엄마는 가늘어진 손으로 생에 첫 전기톱을 잡았다. 처음에는 위잉 울리는 소음에 내항동 주민이 다 나와 쳐다보는듯 했는지 벌건 뒷목을 갖고도 겨우 생채기만 냈지만, 곧 엄마는 무언가에 휩싸였고 그 무언가는 엄마가 온 몸을 흔들어가며 톱질을 하게 만들었다. 땀이 원체 없는 엄마의 등이 젖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손바닥도 땀이 흥건해 전기톱을 여러 번 놓칠뻔도 했다. 목장갑도 없이 그것도 맨손으로 갉아낸 나무는 반쯤 잘라졌고, 이미 생명력을 잃은 나무를 엄마는 발로 연신 차버렸다. 꿀물 울컥울컥 차있는 무화과가 둥둥 떨어졌고, 주워먹을 수도 없이 음식물 쓰레기 거름 위에서 터졌다.
온전히 내 부담이 된 외할머니와 산책 중, 느이 할머니 딸래미가 집 다 박살내고 있다는 이웃의 연락을 받았다. 과연 내항동 집에는 무화과나무 밑동과 그 위에 앉아 숨을 고르는 엄마가 있었다. 악취나는 비석 위에 발을 올려두고는. 엄마가 줄곧 고집했던 단발은 땀에 뭉쳐 올백머리에 가까웠고, 오랜만에 마주한 엄마의 눈썹은 기억 속 그때보다 꽤 짙었다. 그 감상은 외할머니를 잡은 오른손이 떨림에 곧 멎었다. 외할머니는 손에 검버섯이 흔들릴 정도로 온 몸을 떨어댔고, 정신이 돌아온 나는 외할머니를 차에 실었다. 외할머니와 말 한마디 없이 요양원에 도착했고, 눈치없는 요양보호사는 바깥바람 쐐시니 어떠셨냐고 눈웃음치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나는 경황없이 다시 엄마에게 질주했다.
엄마는 시인지 무엇인지를 남겨두고 사라져있었다. 새로 든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왜 내게 이토록 큰 시련을 주는 것인지. 엄마는 무슨 지옥 속에 있는지.
눈길에 격발한 세 길이 굽이 흐르고
한 갈래 꺾인 차례를 우린 사랑이라 부르매
그대 가른 물줄기 여섯 송이
하등 괴로움 없나이다_오화선
꽃과 같이 착하게 자라라 지은 엄마의 이름은 결국 꽃도 피우지 못했고, 착하지도 못한 영 모순이었다. 어쩜 그리도 무화과 나무와 닮아있는지. 나는 부러진 무화과 나뭇가지를 쥐어들었다. 고작 숫자뿐인 8에 지독히도 얽힌 슬픈 이야기들을 가득 끌어앉고 나는 결국 이여덟이다. 꺾인 무화과 나무를 쥐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