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덟_2
화선도 엄마가 있었다.
65년, 뱃속에서 바로 선 아이는 무릎을 거쳐 비로소 머리가 나오고 나서야 악에 받친 울음을 개워냈다. 오화선. 그 아이의 이름.
그의 엄마는 이미 여덟의 자식을 두었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흰머리와 굽은 손가락을 갖고 있었다. 제주에서 넘어온 그는 체 열 살이 되지 않아 살던 동네에서 도망 나왔으며, 지금의 남편을 만나 무려 '아홉'의 자식을 두었다.(사실 여덟째는 화선보다 5살이 많았다. 아버지의 바람은 말릴 수 없는 것이었으며 결국 나타난, 사실은 들켜버린, 결실이 여덟째. 아직도 다른 오빠들이 있진 않을까 화선은 짐작한다.)
화선은 뒤집기보다 걷기를, 말보다 짖기를 더 빨리 배웠다. 당시 아버지는 개를 키우고 있었다. 너무 사나워 식용견이 되어버린 개들. 개들은 화선만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집을 향해 집요하게도 짖어댔다. 하지만 갓난쟁이가 일어나 울음을 터뜨려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1살 위인 오빠부터는 보재기에 싸여 고추밭에 딸려나갔기 때문이다. 더 이상 화선은 울지 않았다. 화선은 목청을 높여 존재를 알리기보다 침묵을 택했다. 그저 주변 사탕봉지나 만지작대다 자버리곤 했다. 화선은 아버지의 애인들이 오면 '애 참 순하다' 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러나 오빠들에게는 짖었다. 정말로 짖었다. 강아지도 암컷 수컷의 형질이 다르다. 암컷은 말랑하고 부드러운데 반해, 수컷은 단단하고 거세다. 화선은 말랑했고, 오빠들은 거셌다. 그들의 움직임은 화선이 바라는 잔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선은 끝없이 경고했다. 짖음으로써.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오빠들은 화선을 무시해 버렸다. 간편하게도. 귀찮게 건드리면 짖어버리는 여동생보다 친구들과 나가 노는 것이 더 재밌을 때니까. 그래도 1살 터울인 오빠와는 꽤 친밀했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눈가락을 후비고 마주 웃기도 했다. 하지만 울음이 터지는 순간, 엄마는 분명 화선을 안아준 적이 없다.
당시 방 하나에 화장실 하나, 그 화장실과 연결된 부엌. 비극적인 환경 탓에 오빠들이 커가며 화선은 겨우 책 읽을 자리만 확보할 수 있었다. 성장통도 사춘기도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여느 날처럼 다리가 아파 낑낑 울던 날. 엄마가 자다 일어나 조심히 종아리를 주물러 줬을 때, 화선은 집이 그렇게 넓은 공간임을 실감했다. 비로소 시야가 그 한 칸을 넘은 것이다. 은혜 입은 까치는 머리가 부서지도록 종을 울렸다고 한다. 화선은 엄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라 작게 주먹 쥐었다.
화선이 태어나던 해, 65년 가을은 유난히 따뜻했고 엄마는 무화과나무 종자를 어디선가 얻어와 고추밭 옆에 심었다. 꼬박꼬박 나오는 열 식구의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 주며, 아직 자그만 나무를 쭈그려 앉아 들여다보기도 했다. 화선이 걷기 시작할 무렵, 무화과나무도 화선의 키만큼 자라났다. 밥투정도 없이 잘 먹었건만 삐쩍 마른 화선의 손목보다 무화과나무의 둘레가 조금 더 두꺼웠다. 음식물 쓰레기만 먹어도 잘도 크는 나무와 다르게 화선은 애정, 사랑 같은 달콤한 것이 체내에 부족했다. 위에 오빠들은 그런 거 없어도 잘만 자라던데, 화선은 자꾸만 그대로였다.
화선의 착한 사춘기는 온 줄도 모르게 지나갔고, 가족은 많았지만 친구는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화선은 항상 엎드려있는 축에 속했고 밥도 그저 박박 긁어진 누룽지 같은걸 혼자 씹었다. 한 때는 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상상도 했었다. 더 이상 혼자 밥을 먹지 않고 혼자 내항 집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항 초입부터 개들이 싸놓은 개똥무더기 냄새와 더불어 그 철창 안에서 나름 번식도 해버린 탓에 개체수가 늘은 식용견들의 입질. 그것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화선의 인생에서 누군가와 '같이' 하고 싶은 일은 날로 줄었다.
화선은 오빠들이 버린 책을 주워 읽으며 국어책 속 시나 소설을 찾아 읽었다. 다른 책 보다 화선이 읽을 수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7-80년대 당시는 시와 소설이 감상보다는 목적지향적인 것이었기에, 화선은 그들의 입맛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 덕에 79년 박정희의 죽음에 화선은 태어났을 때보다 더 큰 울음을 울었다. 78년에 아버지가 주워온 흑백 티비에는 흰 국화더미 덩어리와 검은 추모열 덩어리가 한데 엉켜있었다. 세상이 흑백인 줄 알았건만, 당시 컬러티비에서도 흑색화면뿐이었다고 한다.
화선은 보령 내항(지금의 보령시 내항동) 토박이였다.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고, 그저 교과서적 시각만을 가진, 글을 읽는 솜씨가 유려한 중학생이었을 뿐이다. 화선은 이후 부마항쟁, 서울의 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그냥 겪었다. 그저 알음알음 흘러오는 소문에는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화선은 나라를 위하다 순국한 대통령의 죽음에 왜 추문이 도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학생들은 무슨 연유로 죽게 되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어디에도 물을 곳이 없었고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화선은 피어난 의구심이 어디선가 외면받을 것이라는 것을 내심 알고있었다.
보령은 그즈음 새마을운동 대상지였고 화선의 집 또한 슬레이트 지붕이 올라갈 무렵이었다. 뭣만한 집에도 꽤 많은 슬레이트가 올라가는데 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인들은 코빼기 비추지 않았고, 결국 엄마는 혼자 지붕을 올렸다. 아버지의 개들. 고추밭. 오빠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모두 엄마의 품이 들었지만 엄마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모든 것을 꽉 붙들고 있었다. 한 눈팔면 누군가 채가는 것도 아닌. 다만 스스로 떠날 그것들을.
화선은 어릴 적 다짐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어딜 나돌아 다니든간에 화선은 엄마 곁을 지켰다. 하지만 엄마 생각은 좀 다르지 싶다. 엄마는 화선을 꽤 귀찮아했다. 이미 쏟아버린 애정은 화선에게 갈 용량이 없은 지 오래였고, 화선도 이를 인지하여 정서적 교감은 바라지도 않는 참이었다. 그래도 서러운 것은 서러운 것. 없다 싶었던 결핍이 눈을 떴다. 그때 봐버린 엄마의 생경한 눈빛은 무화과나무를 향해있었고, 화선은 이 날을 잊지 않는다.
비로소 화선은 꿈을 가졌다. 단순히 시를 좋아한 정도는 넘어선 지 오래였다. 위로 오빠들의 놀림을 피해 조용히 음미하고는 눈물도 꽤 삼켰다. 신경림, 고은, 김지하, 정호승을 거쳐 화선은 교과서 속 정희성의 '빈터'에 몰입했다. 꺾인 나무가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빈터에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 꺾인 나무. 비로소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공란이었던 장래희망 칸에 비로소 '시인'이 적힌 날, 화선은 보령 내항을 아우르는 공간을 다 가진 듯 꿈에 빠졌다.
식구들은, 특히 엄마는 화선의 꿈을 반대했다. 주변환경의 탓에 많이 낡아버린 엄마의 감수성으로는 '시인'이 장래희망인지도 의심스러웠는지, 감히 동감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면 그만, 결혼하고 나서 그때서야 너 하고 싶은 거 다하란 말은 오히려 화선에게 그런 날은 없으리란 확신을 주었다. 화선의 꿈은 한 차례 꺾였고, 그를 극복할 확신은 더욱이 없었다.
그렇게 여상에 진학한 화선은 개중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였고 여전히 친구는 없었다. 그 탓에 공부에 전념할 수 있어,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그러니까 하루 총 네 번의 버스를 타며) 노고를 인정받는 듯, 19살에 은행에 스카웃되었다. 은행에서도 친하다 말할 수 있는 동료가 없었고 오히려 열 아홉인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천지였다. 그럴수록 화선은 책에 의존했고 시를 갈망했다. 못이룬 시인의 삶이 오히려 화선을 조여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