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덟_3
내항동할머니는 이름이 없다.
엄마는 분명 알텐데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외할머니라고 부르란다. 아니면 내항동 할머니.
할머니가 처음 나를 못알아 보셨던 그 날. 할머니는 당신을 '구니'라고 소개했다. 그마저도 생소했지만 재차 말한 '구니'만큼은 또렷했다.
구니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어느 것도 기억나지 않는 제주도 어느 초가집. 구니가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는 꽃바구니를 선물받은 듯하다며 이름을 '구니'라고 지었다. 38년 제주의 5월에는 동백이 한창이었고 새빨간 핏덩이는 제주를 감싸는 동백꽃 무더기보다도 더 더 큰 울음을 울었다.
나름 당시의 로맨티스트였던 아버지의 낭만덕에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구니는 당시의 행복이 기억나지 않는다. 불행은 행복보다 큰 잔상을 남긴다. 그 상흔을 구니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여덟이 되어 봄에 개나리 흙덩굴을 천장 삼아 누워있을 때 아방이 말해주기를 우리 마을에선 팔삭둥이들이 다 죽었단다. 그래서 어멍이 나를 품고 고작 팔 개월 즈음에 태 동이 거세지니, 새벽에도 오줌을 놓고는 '조금 있다가 나오너라' 했단다. 먹은 것도 없어 가죽 에 번개자국만 도드라진 배에 배꼽이 얼마나 툭 튀어 나왔나, 성질 드러운 아덜새끼 나오기만해라' 했단다.
어멍은 내 어깨가 나올 즘 숨을 거뒀다. 어깨까진 어멍 힘을 받고 나왔는더 그 위로는 힘을 못 받아서인지 여즉 머리쓰는 일은 복잡하다.
단지 아덜새끼는 아니었고 똘새끼였다. 아방은 어명 살아서 지어둔 이름이 다 사내이름이라 곤란했단다. 열 댓이나 먹었을 아방은 제주 통틀어 드문 순정파라 똘 이름이 사내같은 걸 용납 못했다. 아방은 닦이지도 않는 눈물이나 훔치면서, 방금 태어나 손가락 오물거리는 핏덩이에게 이쁜 이름 지어주겠다 다짐했단다.
그렇게 내 이름은 '구니'가 되었다. 그저 꽃바구니처럼 이쁘고 향기롭게 살아라는 뜻이란다. 열 살이 넘어 '비구니'라 놀림 받은 것은 싫었지만, 아무렴 놀림에도 픽 비웃기나 했다.
다섯이 되니 해방인지 개방인지 뭔가가 됐다더라. 흙 주워먹고 자란터라 여즉 단 웃 음을 지어본 적 없었는데. 거리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니 쓴 입안에 단 침까지 돌더라. 한참 전에 지린 똥기저귀를 차고 있으면서도 울음보다 웃음이 나왔다. 배주리는 새벽녘에도 아방을 마주보며 방긋대니, 탄 장작만치 곯은 아방의 입술도 경련일 듯 움직였다.
이따금 아방은 '바구니야, 바구니야'하며 짓궂게 부르곤 했다. '꽃바구니는 됐으니 옥바구니나 받으련'하고 장난을 했는데, 그럼에도 아방이 '옥바구니야'하고 부르면 팔랑팔랑 달려가 안겼다. 작은 구들에서도 아방 품아귀는 너른 나무 같았다. 기억에 없는 당연한 어린시절의 공백에도 옥바구니야 불러주며 안아줬겠지.
구니가 여섯살이 되고도 몇 달이 지난 후, 제주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제주랑 가까운 육지에서 군인들이 도망갔다더라. 빨갱이들이 제주를 휘젓고 다닌다더라. 구니는 군인이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두려웠다. 제주에선 군인이래봐야 동네 어른들이 돌아다니던 것 뿐인데. "군인". 구니는 자꾸 말으로 그것을 뱉어봤다. 알수 없는 두려움이 뱉어내면 사라질듯이. 그래도 여전한 두려움은 구니의 몫이었다.
여덟이 되니 마을의 침묵이 심상치 않더라. 보통에도 할망이 물질하러 가면 아방은 내 손에 마른 김 하나 들려주곤 집을 비웠는데, 이내 여의치 않았는지 아방은 밤에도 종종 집을 나갔다. 내가 할망 겨드랑이에 이마박고 자랑자랑 듣다보면 아방이 슬쩍 일어나 나가곤 했 다. 세 사람이 덮혀놓은 구들 온기가 열린 문으로 빠지며 찬 바닷바람이 들어왔다. 아방 어디 가나 물어보려고 생각하면 곧 할망 팔뚝에 갇혀 잠들기 일쑤였다.
봄 날씨에도 흐린 구름이 심상찮던 날, 아방은 할망과 나를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 이틀은 땅만 팠던 것 같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닷가에는 배들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이따 금 고함소리가 들렸다. 곧 세 사람은 들어갈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아방과 할망은 잔가지를 엮어 흙을 채워 넣곤 구덩이를 덮을 뚜껑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지천에 핀 개나리를 꺾어 뚜껑에 장식했다.
사흘 나흘을 나무 뿌리나 캐먹으며 보냈다. 그마저도 떨어져 내가 칭얼대자 아방이 산짐승이라도 잡아오겠다 말했다. 뚜껑이 열리고 흡뿌려지는 모래와 햇살때문에 아방 뒷모습을 쫓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방은 돌아오지 않았고, 근처에서 들리는 잇단 총성에 아방이 어떻게 됐는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흙은 자꾸 무너져 생매장에 가까웠지만, 할망은 울지 않았다
땅굴에서 일주일은 있었지 싶다. 가끔 풀 밟는 소리도 안나게 고요한 때, 근처 나무 껍질을 조심히 뜯어내 먹었다. 나무 껍질이 너무 벗겨져 있으면 위치가 발각될까봐, 그마저도
옮겨다니며 먹었다. 상황이 이러니 죽든말든 집에나 가고 싶었다. 다시 무덤같은 보금자리로 돌아가 할망을 설득했다
"총소리는 잦아듣었고 바닷가에 배들도 줄어들었다. 죽어도 집에서 죽자."
할망은 내 고집을 이길 수 없었고 우린 진짜 집으로 돌아왔다. 되돌아가는 길을 보니 고작 몇 되지도 않는 거리를 두고 무덤에 있었구나 싶었다. 안심도 잠시, 사람이 없을 집에서는 연기 가 피어나고 있었다
할망은 나를 나무 뒤에 숨겨놓고 누가 있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다. 아마 우리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면 괜찮겠지 하는 무지함이었다. 나는 할망 말대로 나무 뒤에서 꼼짝도 않고 있 었다. 할망이 집으로 향하는데, 마침 매생이 색깔 옷을 입은 사람이 튀어 나왔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못했다. 어슴푸레 붉어지는 노을은 견줄 수조차 없는 빨강이었다. 간신히 비명만 참고 말았다. 익숙한 총성이 또 들리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여덟의 나이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아방과 할망, 집까지 잃은 채 그저 봄기운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겨울이었으면 못 버텼을 찬 외로움에 동사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날 밝으면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리라, 그 다음은? 다음은 없다. 할망을 내가 죽였다. 우리는 무덤에 머물렸어야 했다. 막았어야 했다. 소리라도 쳐서 할망이 도망갈 수 있었다면. 아방도 내가 죽였다. 본인이 먹을 풀뿌리도 내게 줬을 아방. 고작 내 배고픔에 아방을 죽였다. 슬퍼서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 날, 아방의 몫까지 눈물을 흘리며 잠들었다.
그렇게 제주를 떠난 구니는 전라도를 지나 보령에 도착했다. 보령에서 이미 할머니의 존재는 없은지 오래였고, 구니는 작다면 작은 보령을 전전하다 내항에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구니는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아버지의 온기남은 이름을 삭막한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않은 마음이었다.
구니의 이름은 장장 80년을 거쳐 손주에게 닿았다. 그를 떠맡아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