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예전에 썼던, 그리고 아직까지도 느끼는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이전에는 답을 타인에게서 찾았다면 이제는 답이 나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네가 좋아도, 아른거려도 마주하면 다르다. 이전의 너는 아니다. 내가 황홀해 미칠 것 같았던 그런 존재는 여기에 없다. 시간에 실어 흘려보낸 것은 너의 존재도 있다.
그래서 잔상에 이렇게 아직까지 헐떡여도 너는 답이 아니다. 답은 나에게 있고 너는 내 감정에 따라 일부 답이기도 한, 잠시 답일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사람이고 존재고 대상이다. 결속을, 월경을 기대하지 않는 이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더더욱 그렇다. 발전하지 못할 관계, 더 나아가지 못할 관계임을 한정지어지는 것은 그래서 뼈아픈건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만 다가올 수 있는, 객체로 서로 남아야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결국은 합일에 의미를 두는 것은 무의미하더라도 인간의 숙명이다. 그 찰나의 육체적 쾌락, 섹스라는 결합에 인간이 그토록, 하다 못해 지저분할 정도로 집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찰나에 우리는 목숨을 건다.
나 또한 그렇다. 그것이 무서울지라도, 두려울지라도 도외시할 생각은 없다. 너는 분명히 나와 이런 점에서 다르기에 더더욱 답이 아니다. 애초에 답일 수 없다. 뼈아프지만 사실이다. 더불어 머물러있는 관계, 자신을 부정하고 오직 사회를 향한 목소리만을 인정하는 너를 내가 과연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의 자기부정이 깨지지 않을 만큼, 나의 합일시도도 그러할테니까. 아무리 얕은 결속일지라도, 아무리 느슨한 결속일지라도 결국은 추구할테니까.